꼭대기층의 악마들 - 2화
※ 본 작품 『꼭대기층의 악마들』은 실제 직장 생활에서 모티브를 얻은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등장인물, 조직, 회사, 장소명 등은 모두 창작이며 실제와 무관합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땅값 비싼 동네, 삼정역 앞 17층 빌딩.
그 꼭대기층에는 악마들이 산다.
그리고 오늘, 이손은 그 악마들의 장기판에 올라가기 직전이었다.
본 에피소드의 중심이 되는 인물입니다.
이손 주임 (32세)
악마 별칭: 없음 (아직은 인간)
소수점 하나에도 발작하는 정확성 중독자.
계산기를 들고 출근해도 어색하지 않을 강박의 화신.
악마는 아니지만, 오늘도 한 발짝 더 가까워지고 있다.
오진혁 사원 (28세)
악마별칭: 오갈량
정보는 귀신같이 캐오고, 상사의 표정은 초 단위로 캡처하는 센서.
회의실에선 사내 정보통, 복도에선 전략 참모.
충성스럽지만, 가끔은 너무 영리하다. 그래서 묘하게 의심스럽다.
그의 호의와 조언은 진심일까?
아니면 이손을 자신만의 장기판 위로 끌어들이려는 교묘한 계약일까?
이손이 제아상사에 뽑힌 이유는 단순했다.
그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윤태호 주임이 해외 파견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빈자리 메꿀 사람.'
그게 이손의 공식 채용 사유였다.
경력, 역량, 포부? 그런 건 공문서에만 필요한 장식품일 뿐이다.
그리고 찾아온 인수인계.
늘 그렇듯, 인계란 말은 사실상 쓰레기봉투 넘기기에 가깝다.
손때 묻은 파일과 덕지덕지 붙은 책임을 싸구려 테이프로 봉해서, 후임자에게 밀어 넣는 의식.
“제가 하던 건데, 이제 주임님이 하셔야 해요.”
단 한마디에 지난 몇 년의 노하우와 스트레스, 그리고 기묘한 책임감까지 한꺼번에 이손의 어깨로 이식되었다.
마치 병원에서 장기를 이식받듯, 동의서 따위는 없었다.
퇴근 10분 전.
최수아 대리가 모니터를 들여다보다가 눈을 찌푸렸다.
“잠깐만요. 우리 제품에 들어가는 자재에 인쇄 문구가 누락됐는데요?”
사무실 공기는 즉시 얼어붙었다.
2일 뒤 해외 공장에서 생산 라인에 투입될 예정인 자재였다.
잘못된 자재가 그대로 투입된다면?
그건 단순 실수가 아니라, 생산 라인이 멈춰 버리는 수십만 불 손실의 재앙이다.
모두 고개를 숙였다.
범인이 누군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니,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사실, 이번 건은 윤태호 주임이 진행해 온 업무에서 터진 사고였다.
이손은 이제 막 인계를 받은 후임자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 회사에서 ‘막 인계받았다’는 말은 곧 “담당자”라는 뜻이었다.
순간, 가슴속에서 소리가 터졌다.
“내 잘못이 아닌데… 왜 나야?
그래, 늘 그렇지. 스펙이 부족하면, 운도 부족하다.
결국 회사는 책임을 나눠갖지 않는다. 약한 고리 하나를 골라 잡아당길 뿐이다.”
그러나 한서진 부장은 상황을 단숨에 정리했다.
“이 자재, 한국에서 생산하는 겁니까? 담당자는 누구죠?”
침묵.
그리고 동시에, 모든 시선이 이손에게 꽂혔다.
“이손 주임.”
부장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지만, 내용은 사실상 공개처형에 가까웠다.
“왜 아직도 자리에 앉아 있습니까? 지금 당장 나가서 수습하세요.”
책상에 굳어 있던 이손은 얼떨결에 몸을 일으켰다.
속으로만 삼켰다.
“내 잘못이 아닌데… 그래도 결국 나지.”
변명은 허락되지 않았다.
악마의 명령은 곧 실행이었다.
그리고 이손은 오늘 그 지옥의 톱니바퀴에 정확히 끼워졌다.
이손은 자재업체에 전화를 붙들고 매달렸다.
“오늘 밤을 새워서라도 다시 작업해 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차가웠다.
“하루 만에요? 무슨 기적을 바라는 겁니까. 야간 근로자들한테 얘기는 해보겠지만, 기대는 하지 마세요. 우리도 퇴근합니다.”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으려, 이손은 몸을 기울였다.
“위치가 어디입니까?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에서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직접 와서 뭘 하시려고요? 거긴 군부대 옆 시외 변두리예요. 택시도 안 들어가고, 기사들도 헤매는 곳인데… 그냥 그만하시죠.”
뚝.
남은 건 신호음뿐이었다.
이손은 전화를 붙든 손가락에, 서서히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였다.
옆자리에서 오진혁 사원이 슬며시 속삭였다.
“주임님, 그 공장 위치 제가 압니다. 군부대 근처인데 기사들도 잘 못 찾아가요. 제가 지도에 표시해 드릴게요.”
뜻밖의 구세주였다.
이 지옥 같은 사무실에서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다니.
순간, 이손은 '그래도 사람은 악마가 될 운명 앞에서도 빛을 낼 수 있구나' 하고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마음 한켠이 스쳤다.
저건 진짜 도움일까, 아니면 또 다른 계약의 시작일까?
문제를 하나 해결했다 싶었지만, 회사란 원래 다음 스테이지를 준비해 둔 게임장 같았다.
‘설령 오늘 밤 자재를 재생산한다 해도… 그걸 하루 만에 해외 공장까지 어떻게 보내지?’
다시, 옆자리에서 오진혁 사원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주임님, 혹시 번개특송 들어보셨어요?
새벽 다섯 시 전까지 인천공항 집하지에 넣으면, 그날 밤에 해외 공장까지 바로 갑니다.”
이손은 숨을 삼켰다.
“정말입니까?”
오갈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믿어보세요. 대신… 그 새벽에 직접 들고 가셔야 합니다.”
밤 7시 반.
이손은 택시를 붙잡아 공장으로 향했다.
오갈량이 건네준 지도의 덕을 보며, 강을 건너고 논길을 지나, 산길까지 기어올랐다.
그러나 끝내 도착한 곳은 불 꺼진 건물.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두드려도, 소리쳐도, 대답은 없었다.
그 순간, 오래된 콤플렉스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명운대 출신이라서? 강림상사 출신이라서?
아니면 애초에 내가 주임 1호봉으로 깎여 들어왔기 때문인가.
대리였던 내가 지금은 책임만 떠안는 주임이라니…
결국, 잘못된 건 내 선택 자체였던 걸까.”
분노와 자책이 동시에 목구멍을 막았다.
그때 건물 안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음악 소리.
스피커가 토해내는 저음은 이손의 두드림과 외침을 집어삼켰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이 공장은 문 닫은 게 아니라, 단지 ‘회사처럼’ 귀를 막고 있는 중이었다.
이손은 건물을 빙빙 돌았다.
그러다 반지하 창문 틈으로, 외국인 노동자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잠시 후, 고개가 들리고—
드디어 그들의 눈이 마주쳤다.
노동자는 동남아 출신으로 보였다.
표정은 이손과 대비되게 느긋했고, 그의 어깨너머에는 이제 막 돌기 시작한 자재가 보였다.
그 순간, 이손의 머릿속엔 철저한 타임라인이 자동으로 전개됐다.
새벽 2시 생산·포장 완료 → 새벽 5시 인천공항 집하지 도착 → 그날 밤 해외 공장 투입.
오늘 완성해야 하는 건 단순한 박스가 아니었다.
모레 아침, 수십만 불짜리 생산 라인을 멈추지 않게 돌려야 할 심장박동기였다.
이손은 온몸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시계를 가리키고, 두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절박한 얼굴로 몇 마디 영어를 짜냈다.
“Two o’clock! Finish and pack! Please!”
말은 거의 통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과 땀방울이 모든 걸 대신했다.
시계, 손짓, 그리고 지폐 몇 장.
설명은 미약했으나, 사정은 압도적이었다.
노동자는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부터 이손은 기계처럼 움직였다.
자재가 나오면 즉시 검수, 박스에 분류, 테이프로 밀봉.
숨은 가빴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박스 테이프가 갈라지고, 셔츠가 흠뻑 젖어도 그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이손은 이미 계산을 끝내고 있었다.
공장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그는 또 다른 전화를 붙들었다.
“새벽 두 시 정각, 이 주소로 와주셔야 합니다. 절대 늦으면 안 됩니다.”
낯선 산골짜기, 새벽 시간.
정상이라면 기사가 오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이손은 확률 따위에 기대지 않았다.
그는 기사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재확인했고, 번호판까지 받아 적었다.
혹시 몰라서 메모를 두 장 썼고, 휴대폰 배터리 충전 케이블도 다시 확인했다.
그의 정확한 성격은 피곤한 일상에선 강박으로만 보였지만, 위기 속에선 확실한 무기가 되었다.
새벽 2시 5분.
포장이 끝난 박스가 그의 팔에 들려 있었다.
약속했던 콜택시는 기적처럼 정확히 도착했고, 택시는 곧장 인천공항 집하지를 향해 달렸다.
인천공항 집하지로 가는 택시 안.
창밖은 캄캄했지만, 휴대폰 액정엔 아내의 이름이 반짝였다.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지금 전화하면 뭐라고 하지?
‘여보, 나 회사 지킨다고 새벽에 박스 들고뛴다’?
그럼 아내는 뭐라 할까… 영웅이라며 웃을까, 바보라며 울까.”
결국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회사에서의 인정욕이, 가정에서의 평온을 눌러버린 순간이었다.
번개특송 직원에게 박스를 건네며, 이손은 마지막 힘을 짜내 속삭였다.
“오늘 밤, 꼭 목적지에… 제발.”
직원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아침.
이손은 하얗게 불타버린 얼굴로 곧장 사무실에 돌아왔다.
새벽의 사투로 이미 탈진했지만, 보고는 단호했다.
“부장님, 자재 문제 해결했습니다.”
순간, 사무실 공기가 뒤집혔다.
경계와 놀라움, 그리고 ‘저 미친놈 진짜 해냈네’ 하는 기묘한 존경까지 뒤섞인 눈빛들.
그러나 한서진 부장은 냉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어젯밤 경험을 PPT로 정리하세요. 타임라인별로. 내일 팀 전체 앞에서 발표합니다.”
그 말은 곧, 또 한 번의 밤샘 야근 집행령이었다.
이손은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자리로 향했다.
좌절하던 순간, 오진혁 사원이 다시 다가왔다.
“주임님, 부장님은 Franklin Gothic Medium 글자체 좋아하십니다.
제목은 20pt, 본문은 14pt.
그리고 하드 카피로 인쇄했을 때, 한눈에 쫙 들어오는 레이아웃을 제일 높이 평가하시죠.”
그 말은 마치 회사 생존 지침서의 암호 같았다.
보고서의 승패, 나아가 인사고과까지도 결국 폰트 한 줄에 달려 있다는 사실.
이손은 순간 멈칫했다.
세 번째 구원, 그러나 속으로 흔들렸다.
“이게 진짜 도움일까? 아니면 악마의 계약일까?
… 그래도 지금은 손잡을 수밖에 없다.
선택지가 없다는 게, 결국 이 회사의 가장 정확한 룰이니까.”
다음 날, 그의 PPT는 팀원들 앞에서 공개됐다.
타임라인별로 정리된 보고서는, 새벽부터 이어진 그의 사투를 그대로 재현했다.
시간의 흐름에 맞춰, 이손이 취한 조치와 결과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더 놀라운 건 그 모든 목표가 정확히 달성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발표가 끝나자, 회의실엔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박수 소리와 함께, 눈빛의 온도는 달라졌다.
존경과 두려움, 그리고 은밀한 경계.
악마들은 속으로 같은 문장을 공유했다.
‘이 사람… 만만치 않다.’
이손은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장님, 칭찬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만… 왕복 택시비는 주시는 거죠?”
회의실에 웃음이 퍼졌다.
그러나 이손의 속은 웃지 않았다.
“택시비는 받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 대가로 내 영혼 일부가 상납된 건 아닐까.”
악마들의 장기판 위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손은 이미 독배를 들이켰다.
그리고 이제, 누구도 그의 생존 의지를 부정할 수 없었다.
여러분이라면, 잘못도 아닌 사건의 ‘책임자’로 지목되었을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끝까지 발뺌하며 버틸 건가요, 아니면 이손처럼 집요하게 끝을 보며 상황을 뒤집을 건가요?
혹시 당신도 언젠가, ‘악마들의 장기판’ 위에서 같은 선택을 해야 했던 순간이 있었나요?
“악마들의 장기판은, 영상으로도 이어집니다.”
2화의 쿠키영상은 YouTube Shorts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영상 댓글에는 쿠키영상에 대한 설명이 있으니, 꼭 확인해주세요.
https://youtube.com/shorts/UYu3YTwoACk
발표가 끝나고, 사람들은 웃음 속에 삼삼오오 흩어졌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서지현 대리.
그 미소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차갑게 이손을 꿰뚫었다.
마치 속삭이는 듯했다.
“첫 시험은 통과했군요.
하지만 제 기대까지 충족시킬 수 있을까요?”
웃음에 가려진 칼끝.
그 시선은 경고이자 예고였다.
이손은 아직,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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