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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아 Jan 22. 2022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드라이브 마이 카><어나더 라운드><파이트 클럽>

파이트 클럽(1999), 어나더 라운드(2020), 드라이브 마이 카(2021)의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파이트 클럽>의 잭(에드워드 노튼 분)은 무언가와 화해하지 못한 상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오랜 기간 불면증을 겪고 있습니다. 불면이란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고, 병이라기보다는 증상입니다. 불면증을 앓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기보다는, 어떤 문제가 불면증으로 가시화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잭이 숙면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방법들을 시도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아마 잭도, 불면이라는 체험 가능한 고통 배후의 무언가를 해소하고 화해하려 하는 것 같습니다. 잭의 발악이 영 신통치 않던 어느 때에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 분)이라는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타일러는 그 무엇에도 구속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는 거의 대부분의 것들을 조롱합니다. 타일러는 야만, 야성, 폭력, 파괴와 자유입니다. 자신을 한 대만 때려보라는 타일러의 제안에 잭은 어설픈 주먹을 날리고, 둘은 합의된 폭력을 주고받으며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잭과 타일러는 매일 밤마다 싸움을 벌이며 함께 지냈고, 밤마다 모여 싸움을 하는 모임이 거기서부터 생기게 됩니다. Fight Club입니다. 타일러의 야성과 야만에 잭은 동화됩니다. 이들은 문명의 허위를 함께 폭로하며, 파이트 클럽 멤버들의 야수성을 깨워 나갑니다. 잭은 더이상 불면을 겪지 않습니다. 잭은 이렇게 현대인의 불안과 화해한 것일까요. 





한편, 최근 국내 개봉한 영화 <어나더 라운드>의 네 교사는 무력합니다. 그들의 시간을 들여다보면 꾸역꾸역 살고 있다는 말로밖에 표현이 안 됩니다. 특히 마르틴(매즈 미켈슨 분)의 생활이 그렇습니다. 가족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고, 학생들은 마르틴의 수업을 듣지 않습니다. 삶을 통째로 잡아먹을 정도로 거대한 고난은 아니지만, 이런 평범한 얼굴의 고난은 사람을 갉아먹습니다. 이 경우에는 자신이 피식자라는 것을 감각해내지 못하기에 어떤 면에서는 더 비참하고요. 결국 마르틴 역시 무언가 시도를 합니다. 잭이 야만을 통해 문명의 허위로부터 도망쳤다면, 마르틴과 친구들은 술을 통해 삶을 바꿔보려 합니다.



이들은 혈중 알코올 농도가 0.05% 일 때 인간이 모든 면에서 더 대담하고, 적극적이고, 유능하게 기능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실험합니다. 와인 한두 잔을 마셨을 때의 상태입니다. 네 아저씨들은 낮동안 0.05%의 농도를 유지하기로 함께 약속하고, 기분 좋게 삶에 빠져듭니다. 수업에서 대담하고 창의적인 시도를 해내어 학생들의 지지를 받고, 가족들과의 관계도 부분적으로 회복하며 행복을 느낍니다. 자신과 분리되어있던 삶에 다시 깊게 몰입한 결과입니다. 술의 신 디오니소스는 도취와 황홀경의 신이기도 하니까요.


아폴론이 다스리는 해가 떠있을 때에는 모든 것이 명확합니다. 이성으로 무언가를 분간하기 위해서는 태양이 필요합니다. 빛이 있을 때에는 사실의 실체를 의심 없이 인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성을 이용해서 행복과 고통을, 선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의 모습과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분간합니다. 아폴론이 이성의 신이기도 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술을 마시게 되면 아폴론은 힘을 잃습니다. 위대한 주신(酒神)은 그런 시시한 분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광기, 도취와 황홀경은 분리의 해소를 기저에 두고 작용하니까요.



인간이 술을 마시면 앞서 말한 여러 이분법의 경계를 흐릿하게 지웁니다. 평소에는 다니지 않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마음을 풀 수 있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의 모습과 자신 사이 경계를 일그러뜨리며 잠시나마 자아와 화해하기 때문입니다. 마르틴과 친구들, 이 네 중년 교사들은 이 힘을 빌리려고 한 것입니다. 이해하기 힘든 삶의 부당함과 그냥저냥 사이좋게 지내기로 마음먹은 것이며 그 시도가 어떻게 그럭저럭 통한 것입니다.

 

<파이트 클럽>과 <어나더 라운드>는 비슷한 방식으로 결말에 다다릅니다. 그 여정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뒤집히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어떤 영화는 천천히 무언가를 쌓아올림으로써 결말에 다다릅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입니다.

 



작년 개봉한 <드라이브 마이 카>는 위로하는 영화입니다. 저에게는 이 영화가 화해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가장 어렵고 떨리는 화해, 자신과의 화해를 다룹니다. 생각해보면 어떤 활동이든 간에 자신과 할 때 제일 어려운 것 같습니다. 자신을 설득하는 일, 사랑하는 일, 돌보는 일들은 타인을 대상으로 둘 때보다 더 어렵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가후쿠는 화해하지 못한 다정한 남자입니다. 비록 화해해야 할 진실을 외면하고 있음에도 그는 여전히 다정합니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과 약함의 부산물로써의 다정함이 무엇을 얼마나 오래 떠받칠 수 있을까요. 그는 애써 미소 지으며, 동시에 진실을 두려워하며, 이리저리 도망 다닙니다. 진실과 화해하지 못한 현재는 괴로운 과거로 조금씩 앙금의 덩치를 키워갑니다.



고통 어린 덩어리를 품고 사는 가후쿠는 히로시마에서 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끝내는 가후쿠를 어딘가로 운전하여 데려갑니다. 가후쿠가 가야 했을 곳이고 가후쿠가 응시해야 했을 광경으로요. 한때는 전 지구에서 가장 생명력과 거리가 멀었던 도시에서 벌어지는 그의 여정을 지켜보노라면, 애잔하면서도 벅찬 마음이 입니다.




화해해야 할 일이 있다면 꼭 화해해야 합니다. 어차피 살아가는 세계는 사람마다 하나이고, 물에 뜬 기름처럼 그 하나와 유리되어 존재한다면 각자가 각자의 불면을 겪게 됩니다. 프롬이 현대인들에게 지적했듯이, 깨어있을 때에는 반쯤 잠들어있고, 잠들어있을 때에는 반쯤 깨어있겠지요. 그럼 우리는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느낌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기보다는 사랑이라는 개념에 의문을 품을 것입니다. 삶을 살아내지 못하고 텅 비어있는 문제들에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화해가 괴로움의 해소는 아닙니다. 화해란 내 마음을 알고 난 후에, 상대방 마음을 알도록 노력하고, 그 둘의 마음이 여전히 못생긴 얼굴로 살아있다는 진실에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니까요. 따라서 실패, 슬픔이나 미움과 화해하는 일은 그것들을 살려두는 일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괴로울 것입니다.


어쩌면 더 정확하고 진실하게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을 지긋이 바라보며, 운전대를 넉넉하게 감싸쥐고, 부드럽게 액셀을 밟으며 삶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을 <드라이브 마이 카>의 관객들은 느낄 것 같습니다. 작년 개봉한 최고의 영화 중 한 편이 여전히 극장에 걸려 있으니 한 해를 시작하실 때에 위안이 필요하시다면 찾아가셔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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