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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아 Feb 10. 2022

수선화, 수선화에게

꽃처럼 한 철만 사랑해 줄 건가요?

1.


John William Waterhouse <Echo and Narcissus>


나르키소스는 아름다운 남자였습니다. 수많은 여자들이 그를 사랑했으나 나르키소스는 그 마음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를 욕망했던 님프 중에는 수다쟁이 에코도 있었습니다. 에코는 나르키소스에게 거부당한 슬픔으로 생명력을 잃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매일 수척해져 갔고, 그녀의 뼈는 돌이 되었습니다. 목소리를 뺀 그녀의 모든 부분이 죽어갔고, 에코는 우리가 산에서 듣는 메아리가 되었습니다.


거만한 미남 나르키소스는 다른 님프들의 구애를 꾸준히 무례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인물이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거나 조화의 원리를 깨뜨리면 휘브리스(hybris)의 서사가 작동합니다. 교만한 인간이 천벌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나르키소스에게 업신여김을 받은 님프 중 누군가의 기도로부터 천벌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 또한 사랑해 보기를.
그리하여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을 당해 보기를!"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는 기도에 응답합니다. 더위에 지친 나르키소스는 물을 마시기 위해 연못 앞에 엎드렸다가 사랑에 빠집니다. 그는 연못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해 스스로를 욕망하고, 찬미합니다. 나르키소스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자신이라는 자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의 광기 어린 사랑에 빠졌습니다.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닿기 위해, 나르키소스는 수면에 키스를 퍼붓기도 하고, 물에 비친 사람을 안아보려 애도 씁니다.


당연히 그의 사랑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나르키소스의 사랑이 커질수록 그는 세상과 더 단절되었고, 절연의 외로움은 그의 광기와 공명했습니다. 나르키소스는 공허한 자기애만이 고여있는 연못 앞에서 죽게 됩니다. 나르키소스의 시체는 찾을 수 없었으나, 그 자리에는 꽃이 피어납니다. 수선화입니다.


2.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정호승 <수선화에게>


살아간다는 것은 고독을 견디는 일이랍니다. 원래 그런 거라니 마음이 좀 놓입니다. 특히, 신께서도 외로워하신다는 점이 참 다행으로 여겨집니다. 그분마저 외로우시다면야 뭐, 나약한 스스로를 미워할 까닭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왜 시인은 수선화에게 시를 지었을까요?


3.


꽃을 살 때 가는 곳이 있습니다. 거의 여든이 다 되어가시는 할머니가 운영하시는 그 꽃집을 나는 무척 좋아합니다. 꽃다발 포장이 귀엽거나 근사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꽃을 늘 넉넉히 주시는 사장님이 무척 다정하십니다. 한 번은 수선화 꽃다발을 사러 갔습니다. 아마 5월이었을 겁니다. 수선화를 찾아보는데 가게에는 수선화가 없었고, 나는 쭈뼛대며 사장님께 수선화는 없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아이고, 도련님. 수선화는 진작에 다 졌어요. 초봄에 잠깐 나왔다가 금방 들어가요."


무지한 소년을 달래듯이, 사장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머쓱해져서 배시시 웃었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아주머니도 웃으셨습니다. 정말로 수선화는 봄에 잠시 폈다가 언제 사랑했냐는 듯이 떠나가는 꽃이더군요. 나르키소스가 미워서인지, 저 날 수선화를 만나지 못해서인지, 수선화를 생각하면 마음이 울렁거립니다.



4.


https://www.youtube.com/watch?v=jZgauc4gEuA

꽃처럼 한 철만 사랑해 줄 건가요? 그대여.
새벽 바람처럼 걸어 거니는 그대여.
꽃처럼 한 철만 사랑해 줄 건가요? 그대여.
여기 나 아직 기다리고 있어.

심규선 <꽃처럼 한 철만 사랑해 줄 건가요?>


전에는 이 노래가 고작 한 철 사랑해주고 말 거냐는 원망처럼 들렸는데, 다시 들으니 한 계절만이라도 좋으니 사랑해 달라고 애걸하는 노랫말 같습니다. 사랑이 답을 받지 못하다 보면, 그 사람의 한 철 사랑이라도 옷깃을 붙잡는 심정으로 바라게 되니까요.


나르키소스를 사랑했던 님프도 이런 심정으로 그를 사랑했나 봅니다. 텅 빈 자기애에 지쳐서 망가진 나르키소스를 보며 에코는 아파했습니다. 자신을 아프게 했던 그를 위해 아파했습니다. 나르키소스가 숨을 거두며 "안녕."이라고 읊조렸고, 메아리가 된 에코는 그를 따라 "안녕."이라고 울렸습니다.


5.


에코 이후에도 누군가는 못된 나르키소스를 위해 아파했습니다. 정호승 시인은 나르키소스의 오만함이 아니라 외로움에 가슴이 아렸나 봅니다. 상(像)을 사랑하는 가여운 운명을 위해, 시인은 시를 지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나르키소스의 자아도취를 조롱하고, 그의 오만함을 미워할 때에, 시인은 고통받던 나르키소스를 위해 아파했습니다.


인간의 외로움을 달랠 시를 누군가에게 부친다면, 그런 지극한 외로움에게 가야겠지요. 따라서 시는 수선화에게 갔습니다.


6.


앞서 말한 꽃집의 노인에게 왜 이렇게 싸게 파시는지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사장님은 웃으시면서, 꽃이 비싸면 사람들이 꽃을 사랑하지 않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남는 게 없더라도 꽃을 싸게 판다고 덧붙이시면서요. 일흔이 넘으면 나도 그분처럼 사람이 되는 걸까요. 나와 무관한 사람들이 꽃을 좋아하길 바라며 매일 노동하는 인간의 마음을, 내 깜냥으로는 헤아릴 수가 없네요.


7.


영화 <빅 피쉬>

황수선화의 꽃말은 "사랑에 답하여" 혹은 "애정의 복귀"라고 합니다. 응답을 애타게 소망하던 나르키소스가 죽어서 대답을 받은 걸까요? 아니면 그가 꽃이 되며, 에코의 사랑에 답할 줄 알게 된 걸까요?


어쨌거나 언젠가 나는 사람이 될 작정입니다. 공상적이고 설익은 사랑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견뎌내며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될 생각입니다. 나를 늘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꽃집의 어른처럼 되려고 합니다. 미워하기 전에 눈물을 닦아주는 슬픔의 시인처럼 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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