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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아 Apr 11. 2022

이반 표도르비치 카라마조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지하생활자의 수기><죄와 벌><택시 드라이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나는 병적인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나는 남의 호감을 사지 못하는 인간이다. 이것은 아무래도 간장이 나쁘기 때문인 것 같다. 하기는 나 자신의 병에 관해선 아무것도 아는 게 없을 뿐 아니라 내 몸의 어디가 나쁜지 그것조차 확실히는 모른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이동현 옮김)


겨울 내내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방처럼 작은 내 방이 그의 글로 꽉 찼다. 겨울에 도스토옙스키를 읽은 것이 처음은 아니다. 그런데 이번 겨울에는 꼭 아이가 자기가 만들어낸 놀이에 방학 동안 열중하듯이 빠져있었다. 열 살 때,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읽느라고 스탠드를 켜놓고 밤늦게까지 열중하던 내 얼굴이 기억이 난다. 나는 꼭 그때의 소년처럼 침대에 앉아 책으로 밤을 보냈다.


꼭 사랑에 빠졌거나 화가 난 사람처럼 나는 자꾸 더워졌다. 꿈쩍 않고 앉아 눈만 굴리며 하는 일이 독서인데, 나는 자꾸 볼이 뜨거워지고 이마에서 땀을 흘렸다. 영하의 온도에도 창문을 열고 이따금씩 더위를 식혀야 했다. 그거로도 열이 식지 않으면 새벽 두 시에 슬리퍼를 끌고 걸으면서 동네를 걸어 다녀야 했다. 그의 소설은, 정확히 로지온 라스콜리니코프와 이반 카라마조프의 나이가 된 나를 그토록 달구어놓았다.  


또한 훌쩍이는 일이 많았다. 지어낸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누구를 위해 울었을까. 가여운 소냐를 위해서 울었던 걸까, 스네기료프와 일류세치카 부자를 위해 울었던 걸까. 그깟 소설 따위를 읽으며 누구를 위해 슬퍼했고 또 왜 베갯잇을 적셨는지 모르겠다. 지어낸 이야기를 인쇄한 종잇장을 넘기며 나는 왜 열이 났고 동시에 슬픔에 젖었는지, 한동안 판단이 서질 않았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우리가 고약한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워서입니다." 알료샤가 계속했다. "하지만 왜 우리가 고약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첫째, 그 무엇보다도 선량하게 살고, 둘째, 성실하게 살아갑시다. 그 다음으론 절대로 서로서로를 잊지 맙시다. 이 점을 나는 또다시 반복하는 바입니다. 내 이름을 걸고서 약속하건대, 여러분, 여러분 중 단 한 명도 나는 잊지 않겠습니다. 지금 현재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여러분의 얼굴 하나하나를 삼십 년이 지나더라도 기억할 것입니다."
(하략)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김연경 옮김)


신촌의 한 카페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마지막 부분을 읽었다. 아직 오전이었고, 2층에 테라스까지 있는 큰 카페에는 손님이 나밖에 없었다. 미챠가 선고를 받고, 이반이 생사의 경계에서 앓으며, 알료샤가 다짐을 하며 이야기가 끝났다. 두 눈의 가장자리에서 눈물이 몇 방울 흘렀고, 손으로 그걸 대충 짓이겨 해치우고는 카페에서 나왔다.


며칠 전에 혀 밑에 무엇이 보기 싫게 난 것을 발견했다. 병원에 가니 림프 낭종이 났다고 했다.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림프의 흐름이 막혀서 났다는 것 같았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 읽고, 그 카페에서 나오자마자 병원에 다시 방문했다. 의사는 낭종이 많이 작아졌으며, 수술을 해도 재발이 잦은 곳에 낭종이 났으니 수술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어떤 할 일은 하지 않고, 어떤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은 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날, 해가 저물 때에, 나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혀 밑에 난 고약한 낭종 때문은 아니었다. 혹시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린 걸까 생각했지만, 자가진단 키트는 음성이었고, 인후통도 없었다. 온몸의 근육과 뼈마디가 심하게 아팠다. 창문을 열어도 땀이 났고, 난방을 해도 땀이 났다. 오른쪽 팔과 왼쪽 어깨는 찌르는 듯이 아팠고, 허리, 허벅지와 발은 낮동안에 두들겨 맞았다는 듯이 아팠다.


고맙게도, 근처에 사는 친구가 갖고 있던 몸살약을 가져다주었다. 약을 먹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전신의 통증으로 새벽 세네시까지 잠들지 못했다. 너무 괴롭고 힘들어서 아픈 사람이 으레 헛소리를 하듯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불을 감싸 쥐고 괴로워했다. 내 끙끙거리는 소리와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골방을 메우며, 나는 이반 카라마조프를 생각했다.


"나는 너무나 젊었고 또 당신을 너무나 강렬하게 사랑했습니다. 이런 말 따위는 할 필요도 없고, 더군다나 내 입장에선 그냥 조용히 당신 곁을 떠나는 편이 더 품위 있을 거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다고 해서 당신에게 큰 모욕이 되지도 않을 테고요. 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멀리 가서 절대 다시 오지 않을 겁니다. 아마 영원히 그럴지도....... 나는 더 이상 파열 곁에 머물고 싶지 않아요....... 어떻든, 더 이상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죄다 말해 버리기도 했고....... 안녕히 계십시오,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나에게 화를 내서는 안됩니다. 나는 당신보다 백배는 더 가혹한 벌을 받았거든요. 당신을 결코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가혹한 벌을 받은 거죠. 안녕히 계십시오.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줄 필요도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너무도 의식적으로 괴롭혔기 때문에 이 순간엔 당신을 용서할 수 없군요. 용서는 나중에 하도록 하죠, 지금은 손을 내밀어 줄 필요도 없습니다.
Den Dank, Dame, begehr ich nicht (부인이여, 감사 따위는 바라지 않노라.)"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김연경 옮김)


이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카체리나(카챠)에게 감정을 쏟아내는 이반의 말이다. 사랑 고백은 이렇게 자해가 될 수도 있다. 차갑고 이성적인 지성인, 이반 카라마조프의 사랑 고백은 그 자체로 자해인 것이다. 이성만을 가지고 세계를 이해하려 하는 젊은 냉소주의자가, 자기 안에도 사랑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그가 쌓아온 냉소주의는 무너지는 것이다. 한 마디, 한 마디 얹어진 말이 또 다른 말을 부르고, 그렇게 말이 말을 부르다 보면 사람은 자기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솔직하고 멍청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끄집어내고 나면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있기조차 어려워진다.


사실 위에서 인용한 대목은, 이반 카라마조프가 등장하는 모든 부분 중에 가장 극적인 부분도 아니고, 가장 유명한 부분도 아니다. 이야기의 전개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도 않는다. 그런 기준으로 소설의 한 부분을 떼어와 이반 카라마조프를 설명하려 했다면, <대심문관>이나, 섬망증에 걸린 이반이 악마를 보는 부분, 스메쟈르코프와의 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볼품없이 악에 받친 저 사랑 고백이 이반이라는 인간, 나아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는 1,600페이지짜리 소설을 통째로 잘라내어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치정과 살해가 뒤섞인 이 소설을 끝내고 나면 결국에는 눈앞에 있는 풍경을 사랑하고 한 번에 한 명의 인간에게 차근차근 봉사해야겠다는 마음만이 남는 것이다. 이건 어떤 종류의 교조주와는 무관하다. <죄와 벌>의 마르멜라도프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에게는 꼭 돌아갈 곳이 필요한데, 작가는 그 그림을 보여줄 뿐이다.


저 대목에서는 이반이라는 사람이 뜨겁게 염원하면서 또 차갑게 거부하는 무언가에 대한 어떤 상(像)을 보여준다. 그 상(像)이야말로 이반이 돌아갈 곳이다. 사랑이나 영원성에 대한 믿음 없이는 죄악이 정의될 수 없고, 어떤 강한 인간도 사랑 없이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건 그가 강한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외로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극이 진행되고, 죄책감으로 앓기 시작한 이반의 병세는 악화된다. 이반의 상태가 많이 안 좋다는 설명을 끝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반이 병석에서 삶으로 돌아올 것인지는 정해지지 못했다. 그가 병으로 앓다가 소설이 끝났다는 것은 내게 희망이자 절망이다. 나는 그가 병을 딛고 일어나 카챠를 사랑하고, 알료샤를 예뻐하고, 미챠의 구원을 바랄 것을 소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반이 병으로 죽고, 알료샤와 카챠 슬퍼하고, 뒤늦게 절규하는 미챠의 모습 역시 그릴 수가 있다.


통증에 지쳐 정신이 나자빠지고, 간신히 잠에 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삶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 것도 같았다. 내가 왜 온몸이 아플 때에 이반을 생각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나는 이반 표도르비치를 위해 눈물 흘렸다. 모두가 드미트리를 미챠로, 알렉세이를 알료샤로 부르지만, 이반을 그의 애칭 바냐로 부르는 경우가 적다. 그 점을 안타깝게 여겨 다시 말하자면, 나는 가여운 바냐를 위해 울었다. 소설을 다 읽은 그날에, 나는 그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몸살에 걸려 아팠던 것 같다.


소설을 읽는 가운데에, 이반이 나오는 대목에서 눈물 흘린 적은 없다. 그러나 스네기료프와 일류세치카, 알료샤, 미챠의 말들마다의 모든 눈물이, 아니 어쩌면 그간 참 부질없다고 생각했던 인생에서의 모든 흘렸던 눈물들이, 사실은 그를 위한 고통이었다. 나와 그토록 닮아있고 또한 그렇게도 멀리 떨어져 있는 내 곁에 한 남자를 위해서 울었던 것임을 안다.


그러니 고쳐 말하여 내가 바라는 것은, 이반이 진실하게 사는 모습이다. 병마를 이기는 건 두번째 문제이다. 이반은 진리를 깨닫는 2초의 순간을 위해, 2조 km를 걸어갈 수도 있는 인물이다. 2초라도 좋으니, 이반이 카챠를 사랑하듯 카챠를 제외한 세계의 나머지를 사랑할 수 있다면, 나는 이반 카라마조프를 잊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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