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서의 기술은 힘을 빼면서 완성된다. 어떤 스포츠의 무슨 기술이건 상관이 없다. 농구공을 던지든, 골프채를 휘드르든 원리는 동일하다. 열심히 애써서 몸을 쓰는 법을 익히고 땀을 흘리다 보면, 불필요하게 들어가는 힘을 털어내는 단계가 찾아온다. 달리기의 기술은, 힘을 들이지 않고 편안하게 발을 옮길 수 있을 때 완성된다.
힘은 한 번 들어간다. 야구공을 던지며 손가락이 공을 채는 그때에, 축구공을 차며 발이 공의 적절한 부분을 때릴 때가 그때이다. 임팩트라고도 종종 표현된다. 야구공이 배트의 스윗스팟에 맞고, 볼링공이 손가락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때까지 중요한 것은 얼마나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그 지점까지 도달하느냐이다. 기술이 성숙에 도달할 때에 사람이 갖출 것은 근력이 아니라 유연성이다. 긴장이 아니라 부드러움이다.
"Do you think you can swing, yes or no?" "Yes." "Then don't try to swing." "By trying to do something you already can do, you mess it up."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잘하려고 노력하면, 일을 망치는 거야.)
재즈만큼 재밌는 밈이 많은 장르도 없는 것 같다. 재즈는 특별하니까. "재즈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너희는 전혀 스윙하고 있지 않아."와 함께 나는 이 비디오도 좋아한다. 재즈에서 스윙이란 다양한 의미로 쓰이고 그만큼 뜻이 모호하지만, 영상의 도입부에서 스승이 건네는 조언은 가르침을 함축한다. 네가 스윙할 수 있으면, 스윙하지 마.
마지막 문장을 제외하고는 이 댓글에 완전히 동의한다. 잘할 수 있는 무언가를 잘하려고 애쓰면 일이 굴러가지 않는다. 중요한 건 행동의 순간을 체험하며 그냥 있는 것이다. 그냥 하는 것이다. 아무런 의도도 없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사람은 사람을 찾는다. 스스로의 무능을 느낄 때, 가족에게 재앙이 닥쳤을 때, 연애사에 시시콜콜한 난관이 생길 때에 말이다. 사람을 찾아서, 이야기를 어렵게 꺼내고, 상담을 하고, 과거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누고, 때때로 웃고 때때로 울고, 다시 서로 등을 보이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우스운 것은 우리가 누군가의 상담사가 되어줄 때에, 우리는 그들보다 나은 게 전혀 없다는 점이다. 내가 내 연애에서 낙담하고 실패할 때에도 나는 친구의 연애를 들어줄 수가 있다. 사실을 듣고, 친구가 왜곡하고 있는 것들을 짚어주고, 너저분하고 담백한 응원을 해줄 수가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훌륭해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의 이야기 밖에 있는 사람은 그 일을 잘하려고 애쓰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 코치가 필드 밖에 있어서 코칭이 가능한 것과 같다. 우리는 할 수 없어서 문제를 겪는 것이 아니다. 잘하려고애를 써서 고난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대부분의 것들을 잘할 수 있도록 태어났다고 나는 믿는다. 본래 사람은 일에 몰두할 수 있으며, 춤을 출 수도 있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무언가를 얻어내고 지켜내고자 인상을 찌푸릴 때에 온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줄 알면, 같이 시간을 보내면 된다. 헛된 희망이 담긴 긴장은 모든 것을 그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