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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앙 Jan 01. 2020

안녕, 2019년

마지막 날의 음악회

30, 31일 연차휴가를 냈다. 19년도 남은 연차를 소진하기 위해서였다. 주말을 포함하면 이제 4일째 쉬는 날인데 그냥 휴식을 하고 있는데도 어찌나 시간이 빠른지, 새벽 1~2시까지 놀다가 자도 다음날은 어찌나 잘 일어나고 개운한지 신기한 나날들이었다.  7시 반까지 남부터미널 역 앞까지 약속을 가려면 집에서 6시 반에는 출발해야 했다. 저녁을 놓칠세라 배고프지도 않았는데 라면을 끓여 얼른 먹고 나갔다. 바깥바람은 쌀쌀하고 추웠다. 1시간에 걸쳐 전철을 3번 갈아타고 오는데 오는 내내 속이 울렁거렸었다. 친구가 얘기했다.

“속이 안 좋으면 돌아갈까?”

“괜찮아, 음악으로 치유될 거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답하곤 약국에서 소화제를 챙겨 먹고 속이 더이상 나빠지지 않길 바라며 음악회장에 들어섰다.

예술의 전당 IBK챔버홀

“많이 당황하셨나요? 우린 클래식을 하는 그룹인데…….” 첫 글린카 6중주 1악장 연주가 끝나고 피아니스트 윤소영 님께서 던진 첫마디였다. 친언니가 피아노를 전공해서 어렸을 때 무의식 중에 클래식 음악들이 귀에 익었다. 그리고 5살 때부터 시작한 발레 덕에 클래식에 대해 내적 친밀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맨 처음 곡이 클래식이었고 모르는 음악이었다 보니, '계속 이런 곡만 나오면 어쩌나' 걱정하던 찰나에 피아니스트가 던진 말이었다. ‘다음 곡부터는 전통 클래식이 아니니 안심하라’는 멘트도 해주셨다.

다음 곡은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이었다. 흔히 아는 터키 행진곡이라기보다 밀고 당김과 강약이 있는, 그러니까 우리 인생의 굴곡을 표현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자유로운 재즈의 느낌과 열정적인 행진 박자가 휘몰아쳤다. 2020년에는 '열정과 긍정의 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열정’과 ‘긍정’이란 단어를 6개의 악기가 온몸으로 표현해낸 느낌이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는 한 해 동안 수고하신 아버지들을 위한 곡이었다. 연주를 듣다 보니 곧 슬퍼졌다. 덧없는 세월들이 속절없이 흘러가는 것이 어쩔 수 없음을 표현하는 곡이었으니까. 서른 즈음이 아닌 서른 둘이 들어도 슬픈 곡이었다. 바이올린, 비올라, 더블 베이스, 피아노, 첼로 5개의 악기가 동시에 화음을 내는 부분은 어찌나 웅장했고, 바이올린 솔로는 어찌나 애절하고 슬펐는지 모르겠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는 음절이 연주 후에도 집에 가는 내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조성모의 '가시나무'는 어머니들을 위해 하루하루 멋지게 살아와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는 자신을 위한 삶을 사셨으면 하는 바람에서 준비하셨다고 했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고,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과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으로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다고 말하는 가사다. 어머니들은 자신을 생각하기보다 자식과 남편을 위해 사신다. 오히려 내가 어머니에게 가시나무 같은 존재가 아닌가 반대로 생각하게 했다. 2020년에는 당신의 쉴 곳이 되어 드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존 윌리엄스 메들리'(슈퍼맨, 스타워즈, 인디아나 존스)의 주요 OST는 각 영화들을 시청하지 않았어도 너무도 유명한 멜로디여서 친숙했다. 앞으로 닥칠 모든 어려움들, 하나하나를 해쳐나갈 때마다 슈퍼맨이 출동해서 모두 해결해주고 한 단계씩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로봇 태권 V'곡은 19년 한 해동안 대한민국 형세가 통합이 되지 않고 분리되는 모습이었는데, 이럴 때, 로봇 태권 V가 국회의사당을 뚫고 나와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돔 속으로 조용히 들어갔으면 하는 희망에서 연주해주셨다. 연말이라서 2020년의 목표를 세우다가 연주회장으로 왔는데, 조금 더 시야를 넓혀야겠다고 생각했다. 개인의 목표가 아니라, 나와 같거나 비슷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마음을 더 가지고 싶어 졌다. 


'아리랑 메들리'는 사실 전국 방방곡곡의 아리랑을 대부분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모르는 곡이 2~3개가 나와서 놀랐다. 해외에 나가면 걷다가도, 말하다가도 한국인임이 무의식 중에 가슴 뜨거워질 때가 있다. 출장을 3~4일 이상 다녀와도 더도 없는 애국자가 되어서 온다. 3,000여 종이 넘는 아리랑 중 몇 개를 골라 편곡한 메들리는 해외에 있을 때 한국인이라는 감정을 떠올리게 했다. 류시화 시인의 <여행자를 위한 서시>를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과적으로 모든 곡이 의미가 있었다.  열정과 긍정이 충만한 2020년, 그 느낌에 맞춰 글린카 6중주의 1,2,3악장을 공연의 첫 곡과 마지막 곡을 완성했다. Plus Chamber Group 송년 음악회는 개인적인 목표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주었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게 해 주었으며, 곁에 있는 사람들이 더욱더 소중해지게 만드는 곡들이었다. 연주회를 나와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소망들을 종이 위에 적었다.

2019년 마지막날 적은 새해소망카드

플러스챔버그룹의 연주는 2019년 함께 한 사람들과의 나날들을 반추하고 2020년 새 희망을 꿈꾸기에 더 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속이 안 좋았는지 좋았는지도 까맣게 잊은 채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생략)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 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온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는 문들을 두르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 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다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여행자를 위한 서시(序詩) / 류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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