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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앙 Apr 14. 2020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시간들

조건 없이 행복한 게 습관이 되고 싶다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여유가 많아졌다. 마음도 시간도. 홀가분했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좋은 결정이었다. 퇴근하고 대학 동기를 십여 년 만에 만났다. 그를 만나기 직전 20대 학생 모습을 떠올리고 있던 차,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선 그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 마주하는 30대 초중반의 남자. 대학시절 학생 때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친구의 모습도 그랬다. 물론 직장인으로서 성숙해서 멋있어진 것과는 별개로 세월이 꽤 흘렀다는 걸 단번에 느꼈다. 우리는 대학시절로부터 십여 년간 쌓인 이야기를 한꺼번에 풀어놓느라 바빴다. 일도 연애도 결혼 이야기도.


친구와 헤어지고 유학 시절 내가 좋아하고 사랑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시험기간이면 중앙 도서관에서, 중문학과 전용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자습했던 시간들. 자전거 타고 기숙사에서 수업 5분 전에 출발해 5분을 늦게 들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수업에 참석했던 시간. 웨스트포인트 미국 사관학교 출신인 미국 친구 3명을 만나 같이 캠퍼스에서 매일 러닝 했던 시간들(그들이 여전사로 느껴졌고, 지금도 그렇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기숙사에서 핫케이크 요리와 파티했던 시간들. 너무 친해져서 기숙사에서 서로 내 집, 네 집 없이 매일을 같이 지냈던 시간들. 한국에 있을 때 경희대에서 선후배로 만났던 친구와 매일 밤 학교 호수를 돌면서 인생과 신에 대해 생각을 나눴던 시간들.


시험 전 날 큰 맘먹고 박카스를 벌컥 들이키고 그 정신으로 밤을 꼴딱 새우고 시험을 봤던 날들. 필드에서 테니스를 가르쳐줬던 캐나다 친구가 귀엽다며 문자로 고백했던 순간들. 성당에서 친해진 타 학교 동생들과 오토바이를 전동차를 타고 밤에 드라이브를 했던 시간들. 체육시간에 암벽 타기부터 다양한 도전과제를 해치웠던 팀원들과 찍었던 사진들을 모아 자신들을 절대 잊지 말라며 각자의 편지들을 담은 사진첩을 받고 놀라고 고마웠던 시간들. 타고난 능청스러움으로 I like you를 인사로 하는 아프리카 친구와 대화했던 시간들(페이스북을 하는 그와 친구가 되어 알게 된 사실은 그가 유부남이었다는 것. 결혼해도 바람은 이렇게 괘심히 필 수 있다는 걸 깨달았) 중국어를 물어보며 친해졌던 중국 친구가 SNS에 업로드했던 사진을 보고 연필로 날 인물 소묘를 그리고선 좋아한다 고백했던 순간과 그냥 친구로 남자고 했다가 어색해졌던 시간들.


장거리 연애하다 한국에서 와준 전 남자 친구와 일주일 동안 캠퍼스에서 함께 지내며 졸업논문을 완성하던 시간들. 홈스테이 한국 아주머니께서 해주신 한국 음식을 매일 점심, 저녁 배 터지게 먹었던 시간들. 어린 동생 룸 메이트와 같이 살며 카르푸에 한 번씩 장 보러 다녀왔던 시간들. 졸업식 때 같이 동행해주면서 캠퍼스 곳곳에서 사진 찍어주며 추억을 남겨주던 의학과 중국 친구와의 시간들.

4년 간의 학업과 유학생활힘들었고 매 학기는 도전이었다. 졸업하고 어언 7-8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작은 추억들이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한다. 30여 년 살아보니 나름의 가치관이 생긴 친구가 말했다.


“00아, 싱글이면 평타는 친다. 결혼하면 배우자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고, 자식까지 낳으면 자식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고. 결혼은 모 아니면 도야. 배우자 잘못 만나서 결혼 뒤에 찾아오는 외로움은 어떤 건지 알아? 실제로 그런 경우 많이 있어. 배우자가 내 마음을 몰라주면 그건 싱글 일 때보다 말도 못 하게 외로운 거야" (이 대목이 이해가 갔다. 연애를 잘못해도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되니까. 싱글 일 때 외로운 건 인간 본연이 느끼는 어쩔 수 없는 외로움이겠지.)


“연하가 뭐 어때서. 우리 나이엔 연하가 나아. 한두 살 차이는 그냥 친구 아니니? 차라리 연하여서 한 살이라도 젊어서, 에너지가 많은 게 좋지”


“지력은 독서로, 근력은 웨이트로 만드는 거야. 운동을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 애매하게 좋아하는 거 말고. 운동으로 성취감을 맛봤던 남자.”


'뼈' 있는 말이었다. 듣다 보니 친구의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 절로 고개 끄덕여졌고 친구와 헤어진 후로도  그 말들이 계속 맴돌았다. 어쩐지 아리송하고 씁쓸한 게 100% 수긍하고 싶진 않았다. 오늘 회사에서 타 부서 팀장님과 점심을 먹은 뒤, 커피를 들고 점심 햇빛을 쬐며 산책하다 여쭤봤다. “팀장님, 결혼은 모 아니면 도예요? 배우자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리스크, 내 자식이 어떻게 태어날지 어떻게 성장할지 모르는 리스크를 떠 앉은 채로 결혼하는 거니까.”


팀장님이 담담하게 답했다.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거, 그게 기적이고 선물인 거야. 내 자식이 어떻게 클 줄 모르고 내 와이프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거. 결과를 모른다는 거.”

점심 먹고 회사 근처에 산책하다 바라본 벚꽃나무

지금 연애도 결혼도 안 했으니 중립에 서 있는 채로 생각하건대 정답 없는 삶에서 연애하든 안 하든, 결혼하든 안 하든, 그냥 이유 없이 조건 없이 행복한 게 습관이 되고 싶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행복감. 길거리를 지나가다 멈춰 서서 예쁜 나무를 넋 놓고 잠시 바라보는 행복감. 이런 몰캉몰캉한 느낌들로 채워진 일상에서 그냥 살아 있어서 기쁘고 행복한 그런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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