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썸프로 Dec 23. 2022

1,000명 관객 무대에 서는 일

끝이 있어 아름다운

대중을 위한 발표가 아니라 정확한 외국어를 구사하는데 초점을 맞춘 해외영업을 오래 하다 보니 여러 명을 상대로 상품을 소개하는 일이 잦았다. 국내외 기자들이 찾아와서 상품소개나 인터뷰를 할 때면 많아야 50명 내외의 사람들이 필자의 제품 소개를 들었던 것 같다. 카메라 세례도 자주 받았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해외영업이라는 현업에서의 일이었다.


대뜸, 경쟁 PT

3개월 전 전사 프로젝트를 해보겠다 지원했다. 현업과 전혀 다른 영역인 전사의 일하는 방식과 조직 성과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었고, 몇 개월 전 전사가 도입한 M365에 대한 기능 활용을 잘 돕기 지원하는 역할이었다. IT라는 비전문 영역 안에서 새로운 기능을 배워 타인을 돕는다는 자체가 챌린지였던 거다. 그런데 이런 생소한 분야인 프로젝트에서 대뜸 경쟁 PT를 한다고 과제를 주었다. 하이브리드 업무방식에 대해 혁신적인 제안을 하는 팀에게 목적지향/기대효과/실행가능성/정성평가 등을 기준으로 등수를 매겨 잘한 팀에게 상금을 준다고 했다. 총상금은 200만 원이었다. 2주밖에 안 남은 데다 현업 부서는 가장 바쁜 시즌이었고 우리 팀은 백지상태였다.

 

후회가 밀려왔다, 왜 이런 걸 하겠다고 지원했을까. 팀장까지 맡은 이상 활기차게 팀원들을 이끌어 나가려고 노력했지만 내심 이러한 상황 자체가 원망스러웠다. 경쟁 PT 무대는 CEO를 비롯하여 각 사업부 책임자분들께서 평가를 위해 모이는 자리에다 전사 직원 1천여 명을 상대로 실시간 생중계를 한다고 했다. '그까짓 대충'이라고 생각했다가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자리였다.

 

리더의 역할

세미나 디데이를 공유받은 당일, 우리 팀은 카페에 모여서 30분 남짓 주제에 대해 우리만의 이야기를 넣어 차별화를 두자고 했다. 발표 내용에 대한 플로우를 잡고 당장 해야 할 일과 다음 회의일정을 잡았다. 7명의 팀원은 각기 장점을 가졌다.  대화의 중간에 선을 그어가며 명확하게 우리가 토론해야 할 주제를 제시하며 방향타를 잡는 팀원, 새롭고 다양한 아이디어로 결정적인 사고의 틀을 제공하는 팀원, 묵묵히 참여하면서 회의내용의 핵심을 잘 정리하는 팀원 등이었다. 현업 팀장님께서 필자에게 2년 전부터 이제는 리더가 될 차례라고 하셨을 때부터 리더들에게 '어떻게 팀원들을 잘 이끌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많이 던졌었다. 가장 많이 들었던 답변은 ‘각 팀원들의 장점을 발견하고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다’라는 말이었다. 처음으로 이 말을 실감했다.

 

팀원 중 어느 누구도 발표하겠다고 지원할 거 같지 않았다. '발표해보고 싶은 분 있으신가요. 원해서 하는 사람이 하셨으면 좋겠어요.' 역시나 지원자는 없었고 필자가 발표자로 당첨됐다. 발표자료 작성은 가장 잘하는 영역에 따라 배정했다. 인당 1~2장씩 쓰고 각자가 맡은 PT 하단에 스크립트까지 적기로 했다. 분업이 나름 잘 됐다. 팀장이었던 필자는 팀원들의 업무진척도를 중간중간 관리하면서 잘할 수 있도록 독려함과 동시에 PT자료, 스크립트 작성을 했다. 또한 발표자로서 전체 스크립트를 발표시간 내에 맞추어 다듬었다.

 

D-Day 3일, 전체 리허설

리허설은 필수참석이 아닌 데다 재택근무일이었음에도 일부러 회사에 출근했다. 생중계를 위한 기술적 장비 체크와 전체 순서에 대한 간단한 리허설을 듣고 보니 더 실감이 났다. 분위기가 엄근진이었다. 엄숙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분위기가 눈앞에 그려졌다. 발표 당일엔 무게감이 상당할 거다.


- 발표자는 동선을 어디까지 가져갈 수 있나요?

- 마이크는 뺄 수 있나요?

- 발표자료를 노트북에 두고 사용해도 되나요?

 

발표 상황에 대한 질문을 계속했다. 이를 두고 친한 타 팀 직원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굉장히 적극적이시네요” “그렇게 보여요? 사람 잘못 봤어요”농담조로 답했다. 적극적인 게 아니라 당연히 체크해야 될 기본사항이었다. 생중계라는 특수성 때문에 발표자에게 허용된 동선은 1평 남짓한 서있는 단상 그 자리 그대로였다. 마이크도 거의 고정된 채로 사용해야 하는 것 같고, 오케이. 해외영업 미팅과 전시회 출장을 하면서 수백 번을 작성했던 사전 체크리스트가 이제는 온몸에 배어서 자동 반사적 본능으로 나왔던 것 같다.

 

진인사대천명

마지막 회의에서 팀원들에게 말했다. ‘1등이 아니면 의미 없다고 생각합시다.’ 1등보단 나머지 등수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저마다의 실망감을 줄이고 싶었다. 1천 명이 실시간으로 보고 CEO와 임원진은 맨 앞에서 우릴 평가한다. 부담감과 중압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진인사대천명. 할 수 있는 만큼 하되 결과는 탓하지 않는다.


D-Day 1

직장인에겐 황금 같은 주말, 발표할 스크립트를 붙들고 수번을 연습했다. 스크립트는 말하면서 시간도 재면서 고치고 또 고쳤다. 주어진 발표시간 안에 하려면 대폭 줄여야 하는데 빼고 빼도 여전히 길었다. 전체 대본에 대한 녹음을 5번 정도 했을까. 필자의 목소리가 타인에게 잘 전달될 수 있게 호흡과 강약이 매끄러워질 때까지 연습했다. 목이 쉬어갈 때쯤 밤 11시가 됐다. 이제 하늘에 맡기고 잠을 청해야겠다.

 

세미나 D-Day, 월요일 오전

디데이인 월요일 오전 10시. 당일 9시 20분까지 오라고 했다. 필자는 9시에 올라가 발표자료의 폰트가 깨지진 않는지, 마이크 위치는 적절한지 등 기술적인 문제들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동안 영업을 하면서 수많은 돌발 상황들을 마주했고 이런 기본적인 부분이 사전 체크가 되지 않았을 때 불러오는 나비효과가 어떤 것인지도 잘 알았다. 세미나 당일, 실제 생중계를 위한 5분 남짓한 리허설 또한 필자가 대표로 맡았다. 리허설 영상이 실시간으로 나가는 줄도 모르고 PT를 넘기면서 아무렇게나 대충 이야기했다. 목소리 톤과 PT가 잘 넘어가는지 등만 확인했다.

 

시작 10분 전이 되자 임직원 분들이 모두 착석하셨다. 분위기는 그야말로 근엄진, 리허설에서 그렸던 분위기와 다르지 않았다. 우리 팀 순서는 야속하게도 제일 마지막이었다. 세미나가 2시간으로 예정되어있었는데 마지막이라면 11시 반 언저리쯤 시작할 듯싶었고, 진짜 그랬다. 발표순서를 기다리는 내내 긴장감은 풀기가 어려웠다.

 

Stay on the edge

타 팀의 발표는 귀에도 눈에도 잘 안 들어왔지만 마무리할 때는 누구보다 힘차게 박수를 쳤다. 그들의 노고가 필자의 노고였고 다 같은 처지란 걸 아니까. 등수도 상금도 누가 가져가든 좋았다. 이미 대중 발표 경험 그 자체가 필자에겐 한 단계 성장이라는 선물이었다. Stay on the edge. 필자가 가슴에 품고 있는 메시지다. Comfort Zone이 아닌 자신 능력치의 가장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경계선을 계속 넓혀 가라는 조언이다. 따뜻하고 익숙한 영역(Comfort Zone)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향해 계속 도전하는 해나가는 선구자의 길이다.

 

1,000명이 관객인 무대 위 드라마

마지막 순서가 되어 나가서 말을 하는데 목소리가 마이크에 울리면서 내 목소리를 의식하는 순간 비로소 떨리기 시작했다. 강연장은 히터를 틀었지만 추위를 잘 타는 지라 발이 닿는 구두의 촉감이 얼음 같이 차게 느껴지면서 다리가 오돌오돌 떨리기 시작했어도 마지막까지 침착하게 끝냈다. 모든 발표순서와 각 팀에 대한 임원진의 질의응답과 피드백이 끝나자, 시상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 시작했다. 막상 시상을 한다고 하니 뭐라도 되지 않을까에 대한 느낌이 들었다. 결과는 은메달. 와! 우리 정말 잘했다.

 

우리, 잘했다

팀원이 필자에게 말했다. 필자의 발표 목소리 처음 몇 마디를 듣고 '아나운서 발성에 놀라 게임 끝이다,  우리가 이겼다'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팀원들이 한 마디씩 건넸다. '하나도 안 떠시고 어쩜 그렇게 잘하세요?', '발표 체질이시네요', '앞으로 계속 발표 맡아주세요'라고 덧붙였다. 팀원들 한 명, 한 명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우리 잘했다, 잘했다'하며 기뻐했다.


잘하지 못할 이유가 훨씬 많은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짧은 시간 내 좋은 콸리티로 완성해냈고 운이 좋아 은메달, 2등까지 했다. 전사 1,000명을 상대로 생중계를 했던 이 날의 발표를 잊지 못할 것 같다. 촉박한 과제 수행을 위한 리더역할의 경험, 수많은 대중 발표에 대한 첫 경험이었다. 으로도 처음의 순간들을 무수히 만나게 될 거다. 언제나 가장자리에 서서 익숙함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움을 마주하게 될 거니까 말이다. '좋은 추억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사 프로젝트 멤버로 설득하여 영입했던 팀원에게서 문자가 왔다. 우리가 다 함께 만든 결과인데 말 한마디도 예쁘게 하는 팀원을 만난 것도 복이었다. 선물 같은 한 마디로 비로소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이 있음에 감사하는 하루가 마무리 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