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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Jun 26. 2017

35.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

'가짜 비밀'의 향연

 나에겐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

 이 문장이 당신의 호기심을 자극했다면 당신은 이미 비밀의 포로다. 걱정은 넣어 두시길. 어차피 우리 모두 비밀의 포로니까.


 우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남의 비밀을 소비한다. TV에서, 신문에서, 카페에서, 술자리에서, 카톡 방에서. 누가 공금을 횡령했느니, 톱스타 A양과 교제하는 B의 정체가 뭐냐느니 하는 시시콜콜한 '안주 거리'용 비밀부터 지극히 사적인 영역인 나, 가족, 애인, 친구들과의 비밀까지. 단골 멘트인 "너한테만 하는 말인데..."와 함께 '비밀'은 그 이름이 무안할 정도로 남발되고 있다.

 내가 아는 비밀의 정의는 이렇다. 말할 수 없는 진실. 국어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숨기어 남에게 드러내거나 알리지 말아야 할 일.

 나의 정의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어찌 됐든 확실한 건 비밀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진실'이다.

 비밀은 진실이다. 진실이기 때문에 비밀이 된다. 되돌리거나 바꿀 수 없는 진짜 사실이므로 감추고 싶은 것이다. '가짜' 명품백은 아무리 잘 만들어 봤자 가짜란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가치가 떨어진다. 비밀이란 그런 것이다. 가짜 명품백의 진실 같은 것. 그렇기에 절대 말할 수 없다. 말할 수 없는 진실. 그게 비밀이다.

 하지만 내 정의대로라면 지금처럼 무분별하게 비밀이 소비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비밀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처럼 쏟아지는 비밀들을 나는 '가짜 비밀'이라 하고 싶다. 입 밖으로 내도 안 내도 그만인, 술자리 진실게임에서 오고 가는 그런 비밀들 말이다.

 다시 말해, 지금 뱉고 있는 혹은 흡수하는 이 시대의 비밀들은 전부 가짜 비밀이다. 그저 씹을 거리가 필요했던 우리에게 던져진 안주일 뿐이다.

 우린 이 비밀들이 가짜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알면서도 끊임없이 비밀을 소비하는 것이다.

 비밀은 그 존재만으로 사람들을 벌 떼 같이 모여들게 만든다. 당최 비밀이 가진 힘이 무엇이기에. 비밀은 어떻게 우리를 그의 포로로 만들었을까?


 비밀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민낯과 같아서 어떤 사람이나 사건의 본질 혹은 가치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어준다. 때문에 그만한 힘과 가치가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진짜를 원한다. 패스트푸드점 메뉴판의 햄버거 사진이 진짜 햄버거와 다르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병역 비리 의심을 받는 연예인이나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한 정치인들에게는 진상규명을 요구한다. 때로는 '알 권리'를 내세워 개인정보를 침해하면서까지 사실을 알아내려 한다. 진실에 관심 없는 사람은 있어도 진실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진실을 알아내려 한다.

 우리는 그런 진실을 비밀이라 부른다. 절대 말할 수 없는, 말해서는 안 되는 '은밀한' 진실. 은밀한 것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벗겨서 정체를 드러내고 싶은 욕구는 본능으로 따라온다.

 비밀의 포로, 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할 일이다.


 그런데 여기엔 모순이 있다.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진실이지만 정작 원하는 것은 환상이라는 점이다.

 영화 <클로저>에 이런 장면이 있다.

 댄과 안나는 연인 사이다. 안나는 댄과의 지속된 관계를 위해 전 남편과 이혼을 결심한다. 그리고 전 남편에게 이혼 서류 도장을 받아내기 위해 잠자리를 갖게 된다. 이에 이상한 낌새를 느낀 댄은 안나를 추궁한다. 안나는 결단코 아무 일도 없었다고 얘기하지만 '진실'을 알고 싶다는 댄의 한 마디에 "잤다"라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 순간 안나를 보는 댄의 눈빛이 배신감에 가득 차 마치 창녀를 보듯 싹 바뀐다.

 어쩐지 많이 보던 장면 같지 않은가. 나의 연애, 나의 친구 관계에 이와 비슷한 장면들이 있었던 것 같진 않은가.

 진실을 바라는 마음속엔 이미 원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댄은 관계라는 이름의 인질을 붙잡아둔 채 진실을 흥정한다. 사실 원하는 건 환상, 즉 안나가 전 남편과 아무 일 없이 이혼 서류에 도장을 받아오는 것이지만 관계를 빌미로 안나에게 진실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실이 밝혀지자 대놓고 안나를 경멸한다. 비밀이 괜히 비밀이 된 게 아닐 텐데, 숨겨놓은 진실이 결코 예쁜 모양은 아닐 텐데, 그걸 알면서도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안나는 인질로 잡힌 관계를 풀어 주기 위해 진실을 털어놓았지만, 정작 댄은 진실을 알게 되자 관계의 목을 처참하게 졸라버린다. 참 모순적이다.

 진짜 비밀은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절대 알 수 없다. 비밀은 그러라고 있는 거다. 정말로 댄이 비밀의 진실을 알고 싶었다면 무언가를 포기할 각오는 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겉으론 이해할 수 있는 척하며 진실이 드러나니 안나를 경멸하는 모순을 저지른다.

 안나가 전 남편과 자면서까지 이혼 서류에 도장을 받았던 이유는 댄과의 관계를 지속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댄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이유도 그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그러나 댄에겐 관계 같은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하나. '내 여자가 딴 남자와 잤다니!'


 오늘날 댄과 같은 모순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해본다.

 우린 가까운 관계일수록 진실을 알고 싶어 하지만 결국 원하는 건 환상이다. 비밀의 실체는 예쁘지 않아 비밀이 된 것인데 그것이 예쁜 모양이길 바란다.

 TV 프로에서 연예인들에게 묻는 단골 질문들을 생각해 보자. "성형했어요?", "여자 친구 있어요?", "결혼은 안 하세요?" 우린 이런 비밀스러운 질문들을 즐긴다. 이미 원하는 답을, 당사자가 답할 수밖에 없는 '정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공허한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진다. 처음 보는 면접 자리나 소개팅,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도 마찬가지. 얕더라도 필요한 그 관계 유지를 위해 공허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다. 속이 텅 빈 질문, 그리고 텅 빈 대답. '가짜 비밀'의 향연이다.

 이런 곳에 쓸 수 있는 비밀이란 것도 대개 그런 얘기들 뿐이다. 제목은 사사로운 이야기로 정했지만 내가 꺼낼 수 있는 사적인 이야기들은 극히 제한되어있다. 누구나 솔직함을 원하지만 그 솔직함이 예쁜 것이기만을 바라니까. 적당히 귀여운 그림에 적당히 솔직해 보이는 예쁜 내용. '사적인 얘기'란 흥미를 끌만한 보기 좋은 옷을 걸치고 적당히 몸을 흔드는 것이다. '엄마가 만들어준' 따위의 이름을 붙인 3분 카레처럼 말이다. 실은 레토르트일 뿐인데.


 결국 내 글도 '가짜 비밀' 덩어리다. 독자와 나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공허한 울림일 뿐이다.

 진실된 글을 쓰고 싶다. 누구나 원하는 진짜를 쓰고 싶다. 가짜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지 않다.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한다.

 하지만 걱정이 앞선다. 사람들은 나의 진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을까. 난 무언가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는 걸까. 안나처럼 내쳐지는 건 너무 큰 두려움이다. 그래서 난 계속해서 가짜 비밀 냄새나는 글을 써단다.


 다시, 나에겐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

 첫 시작으로 사용한 이 문장은 이제 더 이상 당신의 호기심 자극용이 아니다. 적어도 저 한 문장만큼은 '가짜 비밀' 냄새가 나는 문장이 아니란 말이다. 진실이다. 나에겐 정말 그런 문제가 있다. 말하고 싶지 않은, 말할 수 없는, 그런 문제.

 이 글을 적은 이유는 적어도 이 하나의 글만에는 '가짜 비밀' 냄새를 풍기고 싶지 않아서다. '사사로운 이야기'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비밀이 밝혀지는 게 두려운 이유는 소중한 것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가짜 비밀'을 택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가짜'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소중한 것을 잃지 않은 이유가 '가짜 비밀' 때문이라면 그 소중한 것도 가짜였을거란 생각을 한다.

 나는 개인 일기장에도 솔직한 이야기를 적지 못한다. 언제, 어떻게, 누가 볼 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가짜 비밀에 이제는 질식할 것만 같다.

 이제는 '진짜' 사사로운 이야기를 적고 싶다. '진짜' 나의 이야기로 사람들 가슴속의 종을 울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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