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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슌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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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Jan 17. 2022

내가 작아지지 않는 법

자존감, 그게 대체 뭐길래

 자존감, 한동안 열풍이었던 단어다. 이 단어는 필사적으로 지켜야 할 것만 같은 가치를 표방하며 매체를 막론하고 다양하게 요리되었다. 때로는 자기 계발 영상이 되기도 했고, 누군가를 위로하는 힐링 에세이가 되기도, 수많은 강연의 단골 주제가 되기도 했다. 자존감, 그게 대체 뭐길래.

 누군가는 자존감을 이렇게 정의했다.

'자기 스스로가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소중한 가치이고, 어떤 성과를 이룰 수 있을만한 유능함을 지닌 존재라고 믿는 마음. (박성환 <당신의 아이는 지금 행복한가요>)'

 자존감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 부가결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누군가를 떨어뜨리지 않으면 위로 올라갈 수 없는 경쟁 사회 속에서, '을'을 거쳐야만 하는 수직 사회 속에서 '나'를 잃은 채 살아가기란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글과 같은 이런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존감은 나를 지켜주는 무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무기는 너무 부서지기 쉽다. 한번 부서지면 복구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누군가는 복구하는 방법조차 몰라 얼이 빠진 채로 폭포 아래로 떠밀려 간다. 시장은 그 점을 놓치지 않았고 자존감과 관련된 수많은 콘텐츠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는 법, 조직 사회에서 자존감을 지키는 법, 낮아진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법...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변질되며 '자존감'이라는 키워드 자체가 잘 팔리는 콘텐츠화된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내가 주목하고 싶은 지점은 관심이 쏠린 이유이다. 자존감 콘텐츠의 눈 부신 성과는 어쩌면 어떻게든 살고 싶다는, 살아야만 한다는 사람들의 애처롭고 필사적인 표식이 아니었을까.


 얼마 전 모임에서 뮤지컬 배우 친구에게 오디션 1차 합격 소식을 들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의 돋보이는 역할이라 나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고, 마치 그가 최종 합격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그는 기뻐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런 감정을 만끽하지 않으려는 듯한 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이니까. 그가 기쁨에 동요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는 나중에 그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상처받지 않고 작아지지 않기 위한 나만의 바운더리가 있을 뿐이야."

 기쁨과 좌절이란 양극의 감정이 수없이 오갔을 친구의 오디션들이 짐작됐다. 그는 무너지지 않는, 최소한 그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는 미래의 자신을 미리 준비하고 있던 것이다.


 나는 오디션을 보러 다니지 않은지 꽤 되었다. 나 역시 꽤 오랫동안 배우를 꿈꿔왔지만, 나의 알량한 자존감을 지키기 어려운 오디션 시스템에 계속해서 스스로를 내던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디션이야 말로 경쟁 사회를 한데 응축한 시스템의 끝판왕이다. 합격자와 불합격자를 가르고 합격자만 화려한 스포트 라이트를 받게 된다. 불합격자에게 특별한 서사를 불어넣는 시선은 지금이야 일반적이지만, 예전에는 패배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승자와 패자, 주인공과 엑스트라, 개인의 존엄성은 무시된 두 계급으로 나누는 경쟁 시스템인 것이다.

 경쟁이 빠른 성장을 부추긴다는 데에는 나 역시 이견이 없다. 무엇보다 보는 입장에선 경쟁만큼 재밌는 콘텐츠도 없다. 여러모로 실보다 득이 큰 시스템인 셈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는 시스템 안에선 밟히는 사람이 생길 수밖에 없다. 밟힌 사람의 자존감은 여기서 무너진다. 내가 믿었던 스스로를 나 조차도 믿지 못하게 되는 순간부터 말이다.

 지금까지 오디션에 수없이 자신을 내던지는 배우 친구들을 보며 그들의 멘탈이 대단하다고 느껴왔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나처럼 자존감에 유약한 사람들이 아니기에 큰 타격 없이도 계속해서 본인을 내던질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아니었다. 그들도 선택받지 못했을 때 나처럼 절망하고, 좌절하고, 슬퍼하는, 무너진 자존감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나와 똑같은 인간이었다. 그저 기대를 비우는 것으로 '상처받지 않고 작아지지 않기 위한' 자신만의 바운더리를 견고하게 지켜가며, 계속해서 그다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나는 작아지지 않기 위해 늘 도망을 선택했다. 도망갈 곳이 있다는 것, 그리고 도망간 곳에서 나의 존재를 각인시킬 수 있다는 것, 그 또한 얼마나 근사한가.

 하지만 때로는 정말 이루고 싶은 일 앞에선 몸을 내던져보고 싶다는 용기가 생겼다. 오디션을 피했던 이유는 내가 작아지지 않기 위함, 자존감이란 무기를 잃지 않기 위함이었는데 나를 지켜줄 바운더리가 있다면 굳이 피할 이유 또한 없을 테니까. 무너지지 않는 한, 해보고 싶은 일에 과감히 뛰어들 가치는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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