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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Mar 03. 2017

20. 괜찮다고 말해줘요

나는 정말 괜찮은걸까?

 가끔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난 나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해, 하는 생각.
 이 두 문장을 뱉었을 뿐인데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할지 두 눈에 훤히 보이는 것 같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약 35도 정도 기울인 상태로 흐리멍덩한 실소를 지으며 '뭔 헛개나무 뽑아먹는 소릴 하는 거야(줄여서 뭔 개소리야)' 하는 당신의 모습. 그럴 만도 하다. 지금 나는 자기관리는 저 멀리 내던져 버린 지 오래고, 그저 하고 싶은 것만 하려 하고, 의식의 흐름대로 살고 있는 녀석이구나 싶은 삶의 태도를 보이고 있으니까. 만약에 말이죠, 당신이 나를 실제로 본다면 쟤는 그냥 목숨이 달려있어서 살고 있구나, 싶을 거예요.(실제로 요즘은 부쩍 그런 기분이 많이 들기도 한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몇 시간이고 천장만 보고 있든, 먹고 싶은 것을 잔뜩 시켜 입안에 욱여넣고 있든, 어찌 됐든, 무엇을 하든, 시간은 흐르고 하루는 간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이렇듯 잉여로운 태도이다 보니 '가혹하다'는 표현에 실소가 나올 만도 하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 삶이 가혹하다니, 풉, 진짜 웃긴다. 보통 가혹하단 말은 열심히 살아가지만 그만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쓰니까. 김치볶음밥을 해 먹기 위해 김치와 햄을 다 손질해서 볶아 놨는데 막상 밥통을 열어보니 밥이 없는 그런 정도는 되어줘야 정말 가혹한 것이지. 난 김밥천국에 가서 다 만들어진 김치볶음밥을 주문해 맛있게 먹어버린 주제에 스스로에게 가혹하다 얘기하고 있잖아.


 하지만 정말 내 인생은 너무 가혹한 것 같다 느낄 때가 있다. 믿기 어렵겠지만 신이 나를 버렸구나,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 시기는 잦지는 않지만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인생이란 무대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가도, 순식간에 지나가는 행인 37번이 되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행인 37번에서 다시 주인공이 될 때도 있다. 그럴 땐 바보같이 그냥 웃어버리고 만다. 역할을 잃었을 때의 기억은 아무렴 상관 없어지는 것이다. 지금 기분 좋고 행복하니까, 그깟 슬픈 기억은 술자리 안주거리 정도의 무용담이 되어버리는 것이지. 마치 내 얘기를 남 얘기하듯이 하면서 말이야.
 심지어는 아픔의 한가운데 서 있는 동안에도 나 자신의 슬픔을 인지하지 않으려 할 때도 있다. 그것이야 말로 정말 가혹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말로 가혹한 것은 나 스스로가 행인 37이 된 것에 가혹함을 느끼지 않으려 한다는 것, 그것이다. 누가 봐도 가혹한 일임이 분명한데도 스스로에게 되뇐다. 이건 가혹한 일이 아니야, 이보다 힘들게 사는 사람은 훨씬 많아, 난 아프지 않아, 이런 건 진짜 아픔이 아냐, 이건 엄살일 뿐이야,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잊힐 거야, 난 괜찮아.
 어쩌면 이것은 내가 겪어버린 아픔을 잊기 위한 자기 위안 일수도 있지만,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한 결과인 것 같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제 3자의 눈으로 내가 겪은 아픔을 저울질하는 것이다. '음, 이 정도의 경험은 누구나 다 하니까 눈물 흘리는 건 오버야',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나니 태연하게 넘어가(는 척이라도 해)야 해'. 어쩌면 영화관에서 슬픈 영화를 보며 눈치 보여 울지 못하는 것과 비슷할지 모르겠다. '뭐야, 이 장면이 눈물 흘릴 정도야?'같은 시선이 두려운 것이다.
 언제부터 나의 감정에 무게가 생겼고, 그 무게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기준이 생긴 것일까? 어린아이들은 슬프면 그 자리에 드러누워 목 놓아 울어버리고, 기분이 좋으면 온 천지를 뛰어다니며 기쁨을 표출한다. 하나 나이를 먹을수록 감정 표현을 제한하는 '감정 억제 매뉴얼'같은 것이 생겼고, 그에 맞게 행동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 혹은 사회 부적응자가 되어버리는 세상 속에 살게 되었다.
 친한 친구를 잃은 것과 아끼는 반려동물을 잃은 고통과 슬픔의 무게는 결코 누구의 기준으로도 그 무게를 달 수 없다. 어떤 것이 '더 아프고 슬픈' 경험이라 얘기할 수 없는 것이다. 감정이란 늘 상대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거니까. 같은 영화의 같은 장면이더라도 누군가는 눈물 콧물을 쏟는 반면, 누군가는 클로즈업된 배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역시 우리 오빠는 우는 모습도 아름다워★' 같은 생각을 하며 감탄하고 있는 법이다. 우린 '다른' 삶을 살아온 '다른' 사람들이기에 아픔을 느끼는 지점 역시 전부 다르기 때문이다.
 가끔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생뚱맞은 지점에서 갑자기 폭소를 터뜨리거나 눈물을 흘리는 출연자가 우스꽝스럽게 연출되는 장면을 보게 된다. 패널들은 너도 나도 '도대체 이 상황에서 왜 울어요?'라고 말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던진다. 대부분 당사자는 '저도 모르겠어요'라며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흐르는 눈물 콧물을 닦기 바쁘다. 만약 내가 당사자였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글쎄, 나 또한 '모르겠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내 심장이 아프다고 하니까 눈물이 흐르는 것인데, 달리 대답할 말이 없지 않은가. 아니, 생각해보면 눈물 흘리는 사람에게 '왜 울어요?'라고 묻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왜 울긴요, 슬프니까 울지. 하지만 우리는 참는다. 분위기에 해가 되지 않기 위해,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내 심장은 울어달라 소리치지만 그런 목소리 따윈 꾹 삼켜 버리고 억지로 입꼬리를 귀 끝까지 찢어 올린다. 슬픈 사실은 나 자신도 이런 상황을 아프게 받아들이는 이유를 나 자신이 약한 탓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겨우 이런 것 때문에 슬픈 거야?'라고 되뇌며 강하지 못한 자신을 원망한다. 나라도 나를 위로해주면 좋으련만.


 2013년, 오스트리아 린츠에 갔을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두 달간의 유럽 여행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처음으로 혼자 떠난 장기 여행이었기에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사건은 출발 당일 유럽행 비행기를 놓치는 것부터 시작해서, 기차표 잘못 예약해서 10만 원 날리기, 프랑스 망통(menton) 어느 으슥한 산속에 낯선 사람과 함께 표류되기, 프라하에서 지하철 표를 잘못 뽑아 경찰서로 끌려갈 뻔 하기 등 다양한 얼굴을 하고선 여행 곳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린츠에 도착했을 무렵엔 웬만한 사건은 초연하게 대처하는 상태가 되었었다. 그래서 였을까. 아직 안심할 때가 아니라고 경고하듯, 린츠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린츠에서는 카우치 서핑을 통해 알게 된 실비아의 집에서 머물렀다. 실비아는 남편 크리스티앙과 검은 고양이 라비올리(가명이다. 이름이 기억이 안 나서 그 집에서 먹은 라비올리 파스타가 떠올라 붙여봤다.)와 함께 살고 있는 직장인이었다. 실비아는 굉장히 친절한 호스트였는데, 먹을 것을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는 농담이고, 먹을 것을 만들어 준 것뿐만이 아니라, 집에서 지내는 동안 조건 없는 호의와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의 관심과 배려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린츠 역에 도착하여 그녀를 만나자마자 그녀는 나를 마트로 데리고 갔다. 그녀가 "뭐 먹고 싶니?"라 묻기에 "파스타"라 대답했더니 냉큼 냉동 라비올리와 파스타 소스를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내가 계산을 하려 지갑을 꺼내자 그녀는 정색하며 이렇게 얘기했다.
 "내 손님은 내가 계산해."
 반할 뻔했다. 돈 내줘서 그런 건 아니고요. 가난한 여행자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태도에 감동한 것이다. 그녀가 카우치 서핑을 하는 이유도 자신이 여행을 다니며 수많은 여행자의 카우치에 신세를 졌던 만큼 본인도 보답하고 싶기 때문이라 했다. 다들 그런 생각은 하지만 실천하긴 쉽지 않잖아. 멋있었다.
 멋있는 그녀는 내게 자전거도 빌려줬다. 린츠는 그리 큰 도시가 아니라 자전거로도 금방 돌아볼 수 있을 거란 얘기를 덧붙이며. 자전거를 빌린 순간부터 이미 머릿속엔 아름다운 린츠의 골목을 휘젓고 다니는 뮤직비디오가 그려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
 나는 그녀의 남편, 크리스티앙의 자전거를 타고 린츠 시내로 향했다. 상상한 대로였다. 거리는 아름다웠고, 자전거를 탄 기분은 내가 상상한 뮤직비디오의 그것과 흡사했다. 괜히 지나가는 사람에게 눈을 찡긋거리기도 하고 지저귀는 비둘기들을 향해 휘파람을 불어보기도 했다. 자전거 하나로 순식간에 디즈니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었다.(한 마디로 생쑈를 했다.)
 기분이다 싶어 익숙한 시내를 벗어나 더 멀리 나가기 시작했다. 점점 인적이 드문 곳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더니, 어느새 난 산을 오르고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정상 비슷한 곳에 올라가니 전경이 꽤나 멋졌다. 근처에는 야외에서 운영 중인 펍도 하나 있었다. 이런 곳에서 맥주가 빠지면 또 섭섭하지. 펍에 들어가 맥주 한 잔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맥주 한 잔을 비우고 나서야 이제 돌아가야겠다 싶었다. 다시 자전거에 몸을 싣고 올라왔던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MTB를 타고 올라왔었나 싶을 정도로 가파른 길들이 이어졌다. 적당히 알딸딸한 기분에 시원한 바람이 내 살갗을 스쳐 지나가고 있자니 '아, 좋은 생이었어'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던 찰나, 쿵. 갑자기 눈 앞의 코너에서 트럭 한 대가 쑥 하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깜짝 놀라 브레이크를 꽉 쥐어 잡았다. 자전거가 갑자기 멈췄고 놀랍게도 나는 튕겨진 채로 하늘을 날았다. 배경음악은 R.kelly의 I believe i can fly이었다.
 그리고 쿵. 정말 마지막 좋은 생이 될 뻔했다.
 쓰러진 채 눈을 뜨자 눈 앞엔 바퀴만 굴러가고 있는 넘어진 자전거가, 그리고 깜짝 놀라 운전석에서 뛰어나오는 운전자 아저씨가 보였다. 아저씬 괜찮냐며,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며 걱정을 했지만, 정작 내 정신은 오직 자전거에만 쏠려 있었다. 자전거! 겁나 멋지고 착한 실비아가 빌려준 자전거! 실비아가 (아마)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편의 자전거!!!!
 몇 차례나 괜찮냐 묻는 아저씨를 겨우 돌려보내고 서둘러 자전거를 살펴봤다. 다른 부분은 말짱한 것 같았지만 손잡이 부분이 찢어지고 스크래치가 나 있었다. 절망스러웠다. 신세를 지고 있는 집에서 호의로 빌려준 자전거를 망가뜨리다니. 맛있는 거 만들어준 실비아가 빌려준 자전거를 망가뜨리다니. 나를 도대체 어떻게 생각할까. 호의를 똥으로 갚는 조심성 없는 무례한 손님으로 느끼진 않을까. 수리비로 엄청난 돈을 청구하지는 않을까.
 어떻게든 망가진 부분을 감춰볼까도 생각해봤다. 이리 덮어보고 저리 덮어봤지만 답은 없었다. 그건 누가 봐도 망가진 손잡이였다.
 몸에 묻은 먼지를 대충 털어낸 후 자전거를 끌고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플랜 B, C를 끊임없이 떠올려 봤지만 적당한 해결방안은 없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국,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식탁에서 노트북을 하고 있는 실비아의 모습이 보였다. 어렵게 사고 얘기를 꺼냈다. 그러자 실비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고, 난 이제 죽었구나, 싶었다. 이제 그녀는 노트북을 조용히 덮고 내게 힘껏 던지리라.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뜻밖의 한 마디.
 "괜찮아?"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목구멍까지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하고 차 올랐다. 욕먹을 각오를 하고 왔는데, 그녀는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줬다. 내가 먼저 챙겼어야 했을 나 자신을 그녀가 먼저 들여다 봐준 것이다.
 난 나 자신이 괜찮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생각했다. 자전거가 망가졌으니까. 나 같은 건 당연하게 일단 뒷 전에 두고 있었던, 아니, 전혀 어디에도 두고 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 자신조차 돌보지 않았던 다친 나를 그녀가 두드려 줬다. 정작 '괜찮냐' 물어봐야 했던 건 나 자신이었는데 말이다.
 고개를 떨궈 내 몸을 살피니 무릎엔 피딱지가 앉아 있었고, 팔 이곳저곳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나는 내가 다친 줄도 몰랐다. 내가 괜찮고 말고는 중요하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실비아가 얘기해줬다, 나에게. 괜찮냐고.


 '괜찮아'
 난 늘 괜찮았다. 남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았고,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기에, 상황을 모면하는 방법으로 '괜찮은 나'가 되는 편을 꽤나 많이 택했다. 하지만 정말로 괜찮았던 걸까. 내 감정엔 피딱지가 앉아있고, 심장의 한 쪽에선 푸른 멍이 번져가는데, 정말 괜찮았던 걸까.
 생각해보면 나는 나의 아픔에 항상 무뎠던 것 같다. 몸이 아파도 병원에 잘 가지 않고, 상처가 나 피가 흘러도 반창고 붙이고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고, 가슴에 꽂힌 비수는 서둘러 뽑아 웃어 버렸다. 그래서인지 남의 아픔에 무디게 행동하기도 했다. 누가 봐도 죽을 만큼 아픈 일이나 병이 아니라면, 다들 내가 느낀 정도의 아픔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그들에게 섭섭할만한 행동을 해 왔던 것도 같다. 그깟 상처로, 그깟 일로 아프다고? 그건 엄살이야.라고 생각해왔던 것이다. 내 아픔을 스스로도 받아들이지 못했으니, 남의 아픔 역시 받아들이지 못했겠지.
 그래서 나, 이 글에서 가혹하단 표현을 처음 써 봤다. 그랬더니, 바로 이 지점이다 싶었다. 그래, 이 지점이었구나. 이 지점이 내 삶이 정말로 가혹한 이유였던 것이구나. 그동안 내 삶은 가혹해선 안 되는, 가진 것에 만족하며 행복하기만 해야 하는, '괜찮은' 삶이어야만 했구나. 나보다 힘든 사람도 많은데 겨우 이런 일로 힘들어야 해? 싶었던 것이다.
 뒤돌아보면 괜찮다 얘기했던 나는 정말로 괜찮지만은 않았다. 괜찮다 말하던 나는 사실 아팠다. 울고 싶기도, 소리 지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난 늘 괜찮은 척했다. 괜찮은 척하는 것이 정말 괜찮은 것인 줄 알았던 것이다.


 실비아와의 대화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한참을 울었다. 여행 중 처음 흘린 눈물이었다. 괜찮냐는 그 한 마디가 왜 이리 가슴 아프게 다가왔을까. 정작 그 말을 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었기에, 그게 너무 미안해서는 아니었을까. 여행 중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에도 나는 울지 않았다. 나는 항상 괜찮은 사람이었다. 아니, 괜찮은 사람이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난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했다. 슬프면 울라고, 아프면 엄살 피우라고, 그래도 된다고 했어야 했다. 아픔은 회피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터뜨려줘야 곪지 않는 것, 그것이 아픔이었다.


 이윽고 크리스티앙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실비아는 크리스티앙에게 내게 사고가 있었다 얘기했고, 우리는 같이 자전거를 살펴보러 차고로 나갔다. 실비아와는 얘기가 끝난 상태였지만 진짜 자전거 주인인 크리스티앙이 나타나자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끼는 자전거였다면, 소중한 추억이 담긴 자전거였다면 크리스티앙 기분은 어떨까? 미안해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크리스티앙은 천천히 자전거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눈으로 먼저 자전거를 훑고 자전거의 이곳저곳을 만져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은 스크래치가 생긴 손잡이 부분에 머물렀다. 그는 그 부분을 조심스레 만지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맥주 마시러 갈까?"

 우리는 밤바람을 따라 도나우강 옆 길을 달렸다. 그는 내가 망가뜨린 자전거를, 나는 실비아의 자전거에 몸을 싣고. 도나우강 옆 이름 모를 어느 야외 펍에서 그는 내게 맥주 한 잔을 건넸다.

 "맥주 맛 괜찮지?"

 "네, 괜찮아요."

 괜찮은 맥주와, 괜찮은 사람 크리스티앙, 그리고 꽤 괜찮은 도나우강의 푸른 야경. 이젠 정말 괜찮구나, 싶은 밤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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