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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Mar 08. 2017

21. 새로운 종류의 카타르시스

배우로 무대에 선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무대 위에 서는 느낌이 마냥 화려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무대 위에 서면 보이는 건 암흑뿐이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깊고 무거운 암흑. 그런 암흑이 객석 뒤 어디까지고 뻗쳐 있는 것이다.
 정신이 나가서 눈 앞이 깜깜 해진 건 아니다. 지나친 무대공포증이 낳은 환각도 아니다. 그럼 무엇 때문이냐. 조명 때문에 눈 부셔서 그런 거다. 배우의 얼굴을 비추는 조명 말이다. 그러니까 실링 라이트(celing light, 무대 앞 천장에 부착하는 조명으로 무대 전반조명 역할을 함)라던지 팔로우 라이트(follow light, 배우의 동선을 따라다니는 조명으로 주로 배우의 얼굴을 비춰줌) 같은 조명 때문에 눈이 부셔 객석이 까맣게 보이는 것이다.
 네, 조크였습니다. 지금부터 무대에 관한 이야기를 할 건데, 가볍게 시작해보고 싶었거든요. 웃기지 않았다면 미안합니다.


 하지만 무대 위에 서면 객석이 잘 안 보이는 건 정말 사실이다. 그 이유가 조명 때문인 것도 사실이다. 처음 무대에 섰을 땐 무서우리 만치 컴컴한 객석의 어둠이 블랙아웃처럼 느껴졌었다. '내가 긴장을 많이 하긴 했구나. 눈 앞이 캄캄한 걸 보면'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어둠의 커튼 뒤에 수많은 얼굴이 숨어있다 생각하니 공포는 더욱더 가중됐다. 마치 트루먼쇼에서 트루먼이 전 세계 사람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던 것처럼.
 하나 (변태같이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엔 묘한 스릴이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 그런데 웬걸, 그 느낌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벌거벗겨진 나의 모습을 온 세상에 노출시킨 듯한 느낌이랄까. (물론 벗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남이 벗은 건 좋지만...) 그러니까, '일탈' 비슷한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음, 일탈보다 좀 더 괜찮은 표현이 있을 것 같은데. 세상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 완전한 자유를 쟁취한 기분? 월요일인 줄 알고 아침 7시에 일어났는데 알고 보니 일요일일 때 기분? 일주일 묵은 변비가 해결된 기분? 학교 째고 PC방에 간 기분? 다이어트 중에 치킨 시킨 기분? 시험 하루 전 소주 다섯 병 들이킨 기분? 아아, 그래. 이 모두를 함축하는 좋은 단어가 하나 있었지. 카타르시스.

 카타르시스.
 정화 혹은 배설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희랍 비극에서 유래된 용어로, 비극이 일어난 후 해소됐을 때 사용하는 용어였으나 오늘날에는 비극적 상황이 아니더라도 극도의 쾌락 상태일 때 많이 사용하는 것 같다.
 무대 위에 서는 일은 내가 여태껏 겪어본 카타르시스와는 다른, 새로운 종류의 카타르시스였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느낌이랄까. 오래 묵혀있던 변비가 한순간 터지며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느낌과 굉장히 흡사한데,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들이 박수를 쳐준다는 것이다. 내가 똥 눴다고 박수 쳐주는 사람들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무대에선 박수를 받을 수 있다.
 배우들은 종종 무대를 마약에 비유하곤 하는데, 무대는 정말 마약 같은 느낌이었다. 합법적인 마약. 준비한 것을 무대 위에 쏟아내고 수많은 사람의 박수를 받으면 척추부터 시작해 목덜미까지 소름이 쫙 끼치며 엄청난 카타르시스가 일어난다. 머릿속에 있던 잡다한 생각은 한순간 싹 다 사라지며 오로지 지금 이 상황을 '만끽'하게 되는 것이다. 그 느낌을 또 맛보고 싶어 또다시 무대에 오르게 된다. 이게 마약 아니면 뭐예요?

 이 카타르시스를 한 번 맛본 사람은 절대 헤어 나올 수 없다. 예를 들면 나처럼 말이다. 재밌는 점은 나는 평소에는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자꾸 무대 위에 오른다는 것이다.
 한 번은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넌 살아있는 게 아니라, 그냥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아."
 한 마디로 인간이 아니고 물건 같다는 얘기다. 낯을 많이 가려서 어색하고 불편한 자리에선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절대 먼저 나서는 일이 없고, 남들 눈치 보느라 눈알 굴린 횟수로 지구 반 바퀴는 돌 수 있을 것 같다. 공기처럼 존재하고 있다가 '어? 너 여기 있었어?'라는 얘기를 들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일상에서의 나는 별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고, 없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무대 위의 나는 다르다. 무대 위에 서면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다른 사람이 되어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내가 어떤 미친 짓을 하든 간에 무대이기 때문에 용서가 될 것 같다는 것이다.
 아아, 오해가 생길까 봐 밝히는데, 모든 것을 잊고 완벽한 역할을 연기해낸다는, 그런 오만하고도 오그라드는 멘트를 하려는 게 아니다. 나같이 별 볼일 없는 인간도 변화시키는 무대라는 특수한 공간의 어마어마한 힘에 대해 얘기하려는 것이다.
 무대는 정말 신기한 곳이다. 따지고 보면 관객과 무대, 두 공간으로 나눠놨을 뿐인데 둘 사이를 가르는 완전히 다른 공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 공기를 들이마신 나는 (거의 완전히) 나 자신이 사라지는 마법 같은 순간을 경험한다. 한마디로, 환상이다.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게 되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환상.
 그래서인지 나를 원래 알던 사람들은 무대 위의 내 모습을 처음 보고선 대부분 이렇게 얘기했다.
 "완전 다른 사람 같아."
 그럴 만도. 평소에 물건 같던 애가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연기하니 이질감이 느껴질 만도 하겠지요. 나는 그런 코멘트가 좋다. 그런 코멘트를 즐기기도 한다. 뭐, 연기를 잘했다는 서브텍스트가 담겨있진 않겠지만 (혹시 담았었다면 감사해요) 어찌 됐든 무대 위에서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면, 꽤 성공한 것 같잖아요?
 그런 코멘트는 또다시 나를 무대로 부르는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더 다양한 인물을 연기해 보고 싶다, 이미 나의 공연을 본 이들에겐 더 새로운 나를 보여주고 싶다, 뭐, 그런 동기부여가 되어주는 것이다.

 무대가 매력적인 또 다른 이유는 관객과 함께 만드는 환상이라는 데에 있다. 무대 위의 이야기는 배우들의 연기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관객들이 봐주는 순간, 그들의 상상력이 함께 동원되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다.
 무대는 CG를 사용하는 영화처럼 완벽한 환상을 구현해내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의 상상력을 빌려야만 한다. 해리포터의 님부스 2000처럼 진짜 하늘을 날아다니진 못하지만 와이어에 매달린 채 빗자루를 타고 다니면 그건 '진짜' 날아다니는 장면이 된다. 사과 하나를 들어 올려 '이것은 오렌지입니다'라고 말하면 그건 오렌지가 되어버린다. 배우와 관객 사이, 무언의 약속이 오고 가는 것이다. 그 어떤 관객도 공연 도중 손을 들고 '어머, 저게 오렌지래. 미쳤나 봐.'라고 하거나 '애쓰시네요. 와이어 다 보여요.'라고 하지 않는다.(어린이 공연은 예외일 수도 있다. 내가 아는 배우는 어린이 공연에서 왕자 역할을 맡았다가 어떤 아이가 "왕자 못 생겼어!"라고 소리 지르며 울음을 터뜨리는 일이 있었다고 했다. 슬프지만 세상엔 환상으로 덮을 수 없는 것도 있나 보다.) 관객들은 환상을 보고 싶어 극장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무대 위의 이야기에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이는 것이다. 관객이 참여함으로써 완성되는 예술. 너무 매력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시작을 했던 것 같다. 무대에 서는 일,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있는 일을 말이다.
 모든 배우가 이 같은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것처럼 무대에 서는 일 또한 마찬가지로 어떤 특별한 경험이라기보다 '일'로써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배우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 대부분이 그럴듯하다. 일이란 것은 익숙해지기 마련이고, 익숙해질수록 긴장과 설렘이 줄어들기 마련이니까.
 하나 다행히도 나는 아직 직업 배우가 아니다. (직업 배우를 꿈꾸지만 동시에 꿈꾸지 않는다. 만약 배우를 직업으로 삼는 일이 이런 감정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라면 난 다른 일로 돈을 벌 것 같다.) 이 말인즉슨 나는 모든 무대에 설 때마다 항상 긴장되고 설렌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긴장이 해소되는 순간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무대에 서야 하는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으로 경험한 카타르시스는 2009년에 올렸던 내 인생 첫 공연 커튼콜 때다.
 당시 나는 19살이었다. 우연히 알게 된 청소년 극단에서 창작 뮤지컬을 하게 되었고 운이 좋게도 주인공을 맡았다. 난생처음 해보는 뮤지컬인데 주인공을 맡았으니 부담감이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19년간 그림만 그리다 '이제부터 노래와 연기를 하겠다'라고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선포한 이후였기에 부담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이 공연이 나의 가능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디데이에 가까워질수록 부담감은 물먹은 솜처럼 빠른 속도로 무거워졌다. 매일매일 머리를 쥐어짜고 열심히 연습했다. 쓸데없는 자존심은 다 버리고 경험이 많은 친구에게 찾아가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대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어보기도 했다. 좁은 집 안에서 유리창에 비치는 오징어 같은 내 모습을 참아가며 밤새 춤 연습도 했다. 그리고 공연 당일이 되었다.
 긴장이 돼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롤러코스터를 타기 전의 긴장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치 이 공연에 나의 모든 것이 달린 것만 같았다.
 분장을 마친 후 대기실 문을 살짝 열고 객석에 앉은 사람들을 확인해봤다. 좁은 소극장의 객석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빈틈없이 앉아있는 사람들 가운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심장이 터질 뻔했다. 가족들과 친구들이었다. 심호흡이 필요했다. 그러나 객석의 라이트는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공연이 시작된 것이다.
 공연은 눈 깜짝할 새에 끝이 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마지막 넘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말도 안 될 정도로 시간이 빨리 흐른 것이다. 공연을 올리는 동안의 체감속도는 엄청났다. 100분이 10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한 씬이 끝나고 서둘러 의상을 갈아 입고 다음 씬에 나가고를 반복하다 보니 공연은 순식간에 끝났다. 내 기억이 왜곡되지 않았다면 다행히 그동안 연습한 것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실수 없이 무사히 장면을 마친 것 같았다.
 남은 건 커튼콜이었다. 어쩌면 몇 달간 미친 듯 연습을 한 이유라고 할 수 있는 커튼콜 말이다. 배우들은 차례대로 나와 관객들에게 인사하기 시작했고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그 순간까지도 벌렁대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을 뿐,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이윽고 내가 인사할 차례가 다가왔고, 무대 밖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깜짝 놀랐다. 눈 앞이 캄캄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객석은 새까만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그 어둠 속에서 엄청난 에너지의 박수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척추부터 목덜미를 따라 엄청난 전기가 타고 올라온 것은. 카타르시스,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카타르시스였다!
 객석으로 끝없이 펼쳐진 어둠은 마치 우주 같이 느껴졌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데다 알 수 없는 에너지가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명이 반사된 관객들의 눈동자는 수억 개의 별 같았다. 순식간에 나는 우주와 마주하고 있었다.
 우주 속에선 엄청난 에너지의 박수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나의 등장으로 인해 우주 속의 무언가가 출렁인 것이다. 나 같은 작은 존재도 우주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생각했다. 실로 엄청난 곳이구나. 무대라는 곳은.
 인사를 마치고 감격한 나는 평생 흘릴 눈물을 무대 위에서 모두 쏟아냈다. 몸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미친 듯이 말이다. 그리도 서럽게 울었던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일 년에 한 번 울까 말까 할 정도로 눈물이 없다.)
 나는 사실 무대 위에서 약속된 것을 하지 않는 배우를 보고 '똥배우'라고 얘기하는데, 정작 똥배우 짓은 내 인생 첫 공연에서 내가 가장 먼저 했었던 거다. 5분이면 끝날 커튼콜을 내가 울어버리는 바람에 5분이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약속을 어겨 커튼콜을 망쳤지만, 그 경험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엄청난 것이었다. 내가 정신줄을 놓고 무대 위에서 눈물을 터뜨린 덕에 나는 어쩌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어떤 감정이 심장 깊숙한 곳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대자연 앞에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서서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고 있는 기분 말이다. 완전한 해방감이 온몸을 휘감으며 나를 주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카타르시스였다.

 가끔 사람들이 묻는다. 티브이에는 언제 나오냐고. 왜 돈도 못 버는 일을 하고 싶냐고.
 그들은 흔히 배우라는 직업을 떠올리면 유명한 연예인 같은 화려한 사람들을 떠올리곤 한다. 눈에 띄는 것은 아무래도 그런 사람들이니까, 그런 사람들이 '배우'의 스테레오 타입인 것이다.
 그러나 배우도 직업이다. 회사원, 요리사, 의사, 간호사, 군인, 경찰, 선생님처럼 배우도 '연기'라는 '일'을 하는 직업이다. 유명하면 인기도, 돈도 얻기 쉽겠지만 모든 배우가 유명해지기 위해 배우를 하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연기하는 것 자체가 좋아서 하는, 유명하지 않은 배우도 많다.
 물론 나는 돈이 좋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인기도 좋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많다는 데 왜 마다하겠는가. 하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 배우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해, 돈을 벌고 싶었다면 이 일보다 다른 일을 먼저 찾는 편이 빨랐을 것이다. 뼈아픈 사실이지만, 배우는 가난한 직업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일을 놓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별 게 없다. 내가 느꼈던 감정 때문이다. 새로운 종류의 카타르시스 말이다. 그것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 바로 배우였던 것뿐이다.
 그렇다고 밥 먹을 돈도, 병원 갈 돈도 없이 어떤 이상적인 것만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싶진 않다. 결국 행복하기 위해 하는 일인데 굶어 죽으면 행복할 것 같진 않기 때문이다. 이것도 계속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돈을 벌기 위해선 유명해져야 한다. 고로 난 돈도 많이 벌고 유명한 배우가 되고 싶다. 다만, 그것을 목표로 삼고 싶지 않을 뿐이다.


 나는 아직도 2009년에 마주했던 우주 속의 빛나는 별들과, 심장 깊숙하게 박혔던 그 감정을 믿는다. 나이를 먹어서도 그런 감정에 집착하는 것이 어리석다 말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여전히 <버드맨>이나 <미스 사이공> 25주년 공연 실황 영상이나 <블랙 스완> 같은 것을 보면 심장이 쿵쾅대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한 카타르시스가 상기되는 것이다. 영상 속의 인물에 나를 투영시키곤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무대 속의 나를 상상한다. 그럼 정말 견딜 수가 없다. 당장 무대에 서고 싶어 질 뿐이다.


 배우들이 무대에 왜 서는지 궁금하셨나요. 이 글을 통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카타르시스. 카타르시스는 누텔라보다 위험하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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