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hun Apr 23. 2017

26. 상담해주지 않는 심리 상담소

심리 상담인가, 심리 분석인가

 "가슴속에 무언가 응어리 진 게 있네요."

 "그런가요?"

 "다음 주 로샤 테스트(잉크 얼룩 모양을 보며 성격을 테스트하는 심리 검사)로 진행하도록 할게요. 시간은 한 시, 괜찮죠?"

 "아... 네. 고마워요."

 어김없이 풀리지 않은 응어리를 가슴속에 품은 채 문 밖으로 나섰다. 멍한 기분으로 나오는 바람에 하마터면 상담료를 지불하지 않을 뻔했다. 다행인지 모르겠다만 카운터의 직원이 불러 세우는 바람에 정신이 깨어 돈을 지불했다. 데스크 위에 놓인 꼬깃해진 만원 한 장.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비용치곤 저렴하다 싶었다. 실은 만원은 상담료도 아니었다. 장소 대관료였다. 다시 말하면 상담료는 무료였다.


 이 심리 상담을 소개하여준 사람은 친한 여동생이었다. 심리 쪽에 관심이 많았던 동생은 관련 전공을 공부하다 이 심리 상담 프로그램을 알게 되어 내게 소개해 주었다. 프로그램은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무료 심리 상담이었다. 전문 심리 상담사가 되기 위해선 일정한 양의 상담 경력을 채워야 한다는데, 이 프로그램은 그 과정의 일환이 된다고 했다. 상담이 필요한 사람은 무료로 전문적인 심리 상담을 받을 수 있고, 아마추어 심리 상담사는 프로로 가는 길로 한 발 더 내딛을 수 있으니, 서로 윈윈 하는 좋은 취지의 프로그램이란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심리 상담 같은 게 필요한 상태는 아니라 생각했지만 딱히 거절할 만한 이유도 없어 제안에 승낙했다. 때마침 나를 떠올려준 동생에게 고맙기도 했고.


 상담실은 집에서 꽤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부담스러운 거리였다. 하지만 기껏해야 일주일에 한 번이고, 열 번만 받으면 프로그램이 끝나는 데다 상담료도 무료이기에 거리 같은 건 별 개의치 않았다. 먼 거리였지만 나를 좀 더 알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기에 오히려 열정이 느껴졌을 정도였다. 그래서 뼈속까지 시린 겨울에도 열심히 드나들었다.

 이렇게 길게, 그리고 진지하게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얼마만인가 싶었다. 사실 처음엔 낯선 사람에게 내 얘기를 한다는 것이 결코 편하진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점이 도리어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편하게 느껴졌다. 오히려 이름을 안 지 얼마 안 되었을 정도로 낯선 사람이기에(내 이야기를 어딘가에 흘릴 일이 없는 사람이기에) 상담하는 것이 편했던 것이다. 상담사와 나의 접점은 오직 내 이야기밖에 없었다. 상담사는 본인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다른 관계가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이 둘 사이의 공통분모는 오직 나의 이야기로만 채워졌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내 주변의 상황이나 사람들에 대한 감정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편하다 할지언정 그 누구에게도 얘기하고 싶지 않은, 얘기할 수 없는 사적인 이야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리 상담을 받기로는 했지만 그런 것까지 들추고 싶진 않았다. 그런 문제는 나 스스로가 해결해야 한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상담은 진전이 되질 않았다. 상담사는 결과를 가지고 오는 날이면 고개를 갸우뚱하곤 했다.

 "결과가 조금 의아하네요."

 상담사의 의아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하고 싶은 말만 골라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상담 결과가 내 상태를 완전히 대변할 수 없음이 당연했다. 그러니까, 솔직하지 못했기에 솔직하지 못한 결과만 나왔던 것이다.

 상담이 5회 차쯤, 대략 반 정도 지나고서야 이대로는 이 시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거라 느껴졌다. 내가 하고 싶은 말만 뱉는 것은 연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난, '진짜' 상담 결과를 위해(그리고 그것을 원했기에) 가능한 한 하기 싫었던 모든 말들도 쏟아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거부감이 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낯선 사람이라는 이유가 거부감의 원인 같았다. 상담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만 해도 낯선 사람이기에 이야기하는 것이 편했지만 이런 깊숙한 곳까지 낯선 사람이 들어오는 것은 불쾌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나 스스로가 낯선 사람에게 벌거벗은 채 다가간 것이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보여주지 못한 내 속마음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보여줬다는 것 또한 속상했고.

 그러나 기대와 달리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용기를 내어 전부를 털어놨지만 상담사는 여전히 전과 같이 상담을 진행할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문 심리 상담이라는 것은 매뉴얼이란 게 존재했다. 일정한 단계를 통해 내 심리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상담을 했다. 나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글로 풀어써보기도 하고, 수많은 질의 응답지 칸을 메꾸기도 하였으며, 집이나 나무 따위, 가족의 얼굴 등을 종이 위에 그려보기도 했다. 번진 잉크 모양을 보며 심리 상태를 분석한다는 로샤 검사도, MBTI 비슷한 검사도 진행했다.

 결과는 수치화되어 나타났다. 나라는 존재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알파벳과 숫자 조합이 되었다. 알파벳과 숫자 조합은 나를 어떤 성향의 사람으로 분류했다.

 전혀 와 닿지가 않았다. 이런 게 내가 원한 '진짜' 결과였던 걸까. 만약 결과가 '진짜 내 모습'이었다 할지라도 이런 식의 방법은 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을까 했지만 오히려 작은 박스 안에 나를 가둬두는 듯한 느낌이었다. 상담은 이런 식으로 검사와 결과가 반복되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로봇과 상담하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만 원이 아깝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비용으로 그리 비싸다 느껴지지 않은 만 원이 아깝게 느껴졌다. 열정이 느껴졌던 상담을 다니던 과정은 곧 내 이야기를 어딘가에 버리고 오는 과정이 되어버렸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다. 오히려 내가 돈을 내고 내 이야길 버리는 꼴이었다. 정해진 요일에 내다 버리는 쓰레기봉투처럼 일 주에 한 번, 난 내 이야기들을 버리러 다닌 것이다. 내 진심이 담긴 이야기들이 알파벳과 숫자로 전산화되어 흩날리는 잿가루가 되어버리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렇게 상담 10회째가 되었고, 나는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났다. 상담을 받았던 기억이 흐릿해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런 걸까, 하고 생각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나란 사람을 필요 이상으로 오픈한 사실이 찝찝했던 것이다. 나는 후회하고 있었다. 상담 이후의 한 달이란 시간이 그 사실을 상기시켜주었다. 찝찝한 감정은 시간의 흐름에도 쓸려가지 않았으니까. 목구멍에 작은 생선가시가 걸린 듯한 한 달이었다.

 그러던 중, 상담을 소개해줬던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그러고 보니 상담은 어땠어?"

 사실 상담이 끝나고 동생에게 상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하나 내 상담이 끝났단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일상이 흘렀고 평소처럼 동생은 나와 연락을 자주 하곤 했는데, 한 달이 지난 시점에 이렇게 상담 얘기를 꺼낸 데엔 분명 이유가 있겠다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동생은 꽤 충격적인 얘길 내게 전했다.

 "실은 상담실 원장님이 오빠가 되게 위험한 상태라고 하더라고. 이대로 군대에 가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대."

 상담실 원장은 동생에게 이 프로그램을 소개하여준, 동생의 지인이었다. 상담실을 오가며 몇 번 얼굴을 마주쳤고 그때마다 웃으면서 가볍게 인사하던 사이였는데.

 "그리고 오빠랑 가깝게 지내지 말래."

 심장 한쪽이 뾰족한 것에 찔린 듯, 푹 하는 소리를 냈다.

 난 상담실 원장과 상담을 한 기억이 없었다. 다시 말해, 상담실 원장은 나에 대해 전혀 모른다. 아니, 알 수가 없다. 기껏해야 지나가다 인사 몇 번 한 정도였으니까.(만약 그것만으로 나를 파악했다면 상담실이 아닌 점집을 차려야 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동생에게 얘기한 내 '상태'라는 것은 어디에서 추측된 것일까. 뭐, 길게 생각할 것도 없지 않은가. 상담사와 나와 진행된 상담 내용을 알고 있는 것 밖에는.

 나의 상담 내용은 휴대폰의 녹음기와 카메라로 녹음, 녹화되었었다. 명목은 상담의 심층적인 결과를 위해서, 뭐 그런 거였던 것 같은데, 찝찝했지만 절대 상담 내용을 밖에 노출시키지 않겠다는 서약서로 약속을 받아냈기에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얘기가 더 깊숙하고 솔직해질수록 카메라와 녹음기가 공격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사전에 동의했고, 어찌 됐든 나를 위한 길이니 감수해야겠다 싶었다.

 원장은 그 자료를 본 것이다.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설사 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무언가로 나를 '친하게 지내면 안 되는 사람'으로 판단한 사실 또한 충격이었다. 당시 나는 충분히, 정말 충분히 멀쩡한 일상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심지어 좀 행복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재단당하는 기분이란 게, 생각보다 더 불쾌하고 역겨웠다.

 동생에겐 어이없다는 듯 한참을 웃고 넘어갔지만, 지난 몇 달간 드나들었던 상담실과 상담사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나란 사람을 단 일주일도 겪어보지 않고 피자 위에 토핑을 얹어 놓듯 '상태가 위험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여지가 있고', '가까이 해선 안 되는' 사람으로 제조하는 데 콧웃음이 나왔다. 도대체 무엇으로? 그 숫자와 알파벳들의 조합으로? 그들의 혈액 속엔 숫자와 알파벳이 흐르고 있나 보지? 심리상담이 필요한 건 내가 아닌 원장 같아 보였다.


 일이 이렇게 되니 한 달간의 찝찝함이 더 무거워졌을 것 같겠지만, 아니, 오히려 상쾌해졌다.

 더 나은 삶의 방향을 묻기 위해 상담실을 찾았는데 그 질문은 나보다 그들에게 더 필요하단 것이었다. 나는 심리 상담을 받은 게 아니었다. 심리 분석 실험에 참여한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간의 찝찝함으로부터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심리학에 대해 잘 모른다. 하나 심리학으로 심리 상담을 받고자 하는 상담자의 심리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 내가 바로 그 상담자였으니까. 나는 정답이 필요했던 거다. 되도록이면 과학적인 근거가 뒷받침되는 정답 말이다.

 나는 비틀거리며 살아왔다. 크고 작은 문제를 안은 채, 어느 방향으로 갈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살아왔다. 그래서 정답이 필요했다. 어느 길로 가라고 누군가가 얘기해주는, 그런 정답이 필요했다. '심리 상담이 필요한 상태는 아니었다' 얘기했지만, 어쩌면 가슴속 깊은 곳에선 간절하게 정답을 갈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상담실을 드나들었던 몇 달간의 먼 거리도, 상담 때마다 지불했던 꼬깃해진 만 원짜리 지폐도, 그런 동기부여 없이 움직였을 리 없으니까.

 비틀거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나뿐이랴. 상담실엔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모두 저마다의 문제를 안은 채, '정답'을 찾으러 그곳에 왔을 것이었다.

 전산화된, 기호화된 정답은 어쩌면 그들에게 한줄기 빛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 상담실이 목표했던 상담의 기능도 그것이었을 거라 추측한다.

 하지만 그 정답이란 대개 '나'의 문제에서 기인한다. 결국 문제의 궁극적인 원인은 '내 안의 어떤 문제' 때문에 그러하다 얘기한다. 이걸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에겐 한줄기 빛이 될 수 있을지언정, 의지가 없는 사람에겐? 혹은 해결할 수 없는 사람에겐? 그들에겐 아무짝에 쓸모없는 기호 덩어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마치 나처럼.


 내게 진짜 필요한 건 정답이 아니었다. 진짜로 필요했던 건, 내 두 손을 따뜻하게 포갠 채, 지긋이 눈을 감고, 조용히 내 이야길 들어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리고 깊은 포옹으로 '괜찮다' 위로해주는, 그런 사람, 그런 상황. 내게 필요했던 건 그런 것이었다. 누군가가 내 목소릴 들어주는 것 말이다

 그러나 그곳의 상담사들은 상담자의 이런 심리는 미처 파악하지 못했었나 보다. 그렇다면 그곳은 간판의 상담이란 단어를 떼어내야 했다. 대신 분석을 넣으면 좋겠다. '심리분석소'. 그래야 자신의 심리를 실험대 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해부해보고 싶은 이들이 찾아가지 않겠는가.


 나는 지금도 가끔 원장이 동생에게 전했던 말들을 생각해본다. 압권은 '군대에 가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부분이다. 바람 빠진 웃음이 새어 나온다. 지금 나는 군인이다. 그런데 지금 내 모습은 어떠한가. 아, 그 사람이 말하는 극단적인 선택이란 게 이런 모습인가?

 생각이 정리되고 나니 상담을 다녔던 몇 달을 다시 떠올리니 새삼 내 주위 사람들에게 미안해졌다. 내 두 손을 따뜻하게 잡아줄 이, 나를 따뜻하게 안아줄 이, 내 목소릴 들어줄 수 있는 이, 그러니까 정말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은 내 곁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난 그들에게 손 내밀지 못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나를 떠넘겼다. 그 사실이 참으로 창피하고, 또 미안하다.

 나는 앞으로도 비틀거리며 살아갈 것이 분명하다.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수없이 깨지고야 말 것이다. 그리곤 정답을 알려달라며 또다시 어딘가에 부딪혀 보겠지. 원래 인생이 그런 것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순간이 다시 온다면 그땐 스스로에게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사실 정답은, 이미 네 곁에 있다고.

매거진의 이전글 25. 내 장례식에서 춤을 춰주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