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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Apr 10. 2017

25. 내 장례식에서 춤을 춰주세요

죽음이란 삶의 완성

죽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길을 건너다 차에 치이는 내 모습을, 비행기에서 추락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자살보단 그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왜 죽었는지 이유를 묻진 않을 테니까.

 죽음을 시도해 보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죽음을 만날 용기가 없었다. 사실 내가 원한 건 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한번 살아봤으니까 다시 시작하면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죽는다고 해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이대로 끝내기엔 놓치고 싶지 않은 것도 (적지만)있었다. 결국 ‘죽고 싶다’는 생각에 도돌이표만 찍으며 고통스러운 삶을 견딜 뿐이었다.
 울기도 많이 울었다. 혼자 걷다 눈물을 쏟아내기도, 누나 품에 안겨 세상이 떠나가라 대성통곡하기도 했다. 두려웠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것이. 하루에도 수백 번씩 생각했다. ‘내가 죽으면 가족들의 얼굴을 볼 수 없겠지’, ‘갑자기 내일 아침에 엄마, 아빠가 사라지면 어떡하지’ 가장 소중한 누군가를 잃는다고 생각하니 온몸이 서늘해졌다. 죽음은 내게 그런 존재였다. 상상만으로도 온몸이 굳어버리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정작 진짜 죽음을 경험해본 적은 없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당시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외할아버지와 나 사이의 어떤 교류나 연대 같은 게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속상했던 건 엄마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었다. 그제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엄마에겐 내가 엄마를 잃는 것과 같은 슬픔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그건 수없이 해왔던 죽음을 상상하는 일과 다를 게 없었다. 그 외에 기억나는 건 키우던 햄스터의 죽음 정도다. 그게 내가 경험한 죽음의 전부다. 어쩌면 그래서 더 두려운 지도 모른다. 죽음의 얼굴을 잘 모르기에. 영원할 것 같던 일상을 한순간에 질식시키는 그 존재를 가늠해볼 수도 없기에.

 소중한 것이 생기면 가장 먼저 생기는 감정은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이란다. 소중한 무언가가 생기면 잃을 일 밖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이 충분히 행복하다면 더 얻을 것에 대한 기대는 없다. 대신 이미 얻은 것에 대한 부재가 미치도록 두려워 지는 것이다.
 돈이 많은 사람도 적은 사람도, 행복한 사람도 불행한 사람도, 나이든 사람도 젊은 사람도 죽음이 두렵다. 나의 죽음이든 남의 죽음이든 죽음은 그 자체만으로 두려움이다. 그것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우리와 늘 함께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우리와 늘 함께하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 말이다. 친구들에게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면 ‘불길한 소리 하지 말라’며 입을 막는다.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방식은 매우 우울하고 조심스러운 데다 비밀스럽기까지 하다. 상을 치른 이에겐 아무런 말도 건네지 못한다. 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이러하다. 조용하고 은밀하게, 그리고 최대한 어둡고 무겁게.
 이대로 괜찮은 걸까. 무거운 문제라고해서 덮어두거나 회피하기만 하는 게 괜찮은 일 이느냔 말이다. 만약 그 대상이 내가 싫어하는 음식이나 동물이라면 덮어두거나 피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 종류의 공포나 두려움은 굳이 맞서 싸워 힘들일 필요가 없으니까. 하나 죽음이다. 처음부터 늘 함께 우리와 공존해왔던 죽음 말이다.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덮어두거나 피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풀어야만 하는, 풀 수밖에 없는 중요한 숙제인 것이다.
 당연히 죽음은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죽어야 할지, 죽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꾸만 얘기하고 싶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늘이라도 당장 죽으면 어떡하나. 그럼 나는 너무 억울해서 저승으로 못 갈 것 같다. 웰빙 못지않게 웰다잉 하고 싶다. 잘 죽고 싶단 말이다. 살아서도 이렇게 후회를 많이 하는데 죽어서까지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는 게 잘 죽는 것일까. 어쩌면 그 시작은 죽음을 꺼내보는 일 부터가 아닐까. 죽음을 회피하고 덮어두기보단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자꾸 꺼내 보는 것이다. 죽음과 싸우려 하지도, 죽음을 정복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죽음이 가진 어둠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그럼 우린 더 이상 죽음을 조용하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 불길함의 징조로, 슬픔만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죽음이 더 이상 막연한 공포가 아니니, 죽음을 앞둔 이도 두려움을 덜 수 있다. 다음 역이 우리 집 앞이듯 자연스레 죽음이란 역 앞에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종교나 예술 따위가 생긴 이유도 죽음 때문이 아니던가. 종교와 예술의 태동은 죽음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존재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기도를 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른다. 그럼에도 죽음의 이미지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 색이 너무나도 짙고 어두워 그것을 지워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더더욱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사실 종교나 예술 따위도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죽음을 추구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저 ‘따르자는’ 얘기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에 그저 몸을 맡기자는 거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조금 미친 소리 같겠지만)나는 사람들이 나의 장례식에 와서 춤을 춰줬으면 좋겠다. 나의 죽음을 축하받고 싶은 것이다. 춤은 당연히 축하의 의미다. 죽음을 축하한다니, 어째 좀 섬뜩한 말 같지만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누군가의 가슴속에 보석 같은 존재로 영원히 박힌 채 마감한 생이라면 그날은 축하받아야 마땅한 날일 테니까.

 나의 죽음을 기념하고 싶다. 그리고 그 방식은 아름다운 색깔로 물든 춤이었으면 좋겠다. 서로 손을 맞잡고 몸을 끌어안은 채 즐겁게 춤을 추며 나란 사람을 추억했으면 좋겠다. 춤을 추다 눈물이 쏟아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계속 춤을 췄으면 좋겠다. 나의 영혼도 함께 춤을 추며 즐길 수 있도록 말이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닌 삶의 완성이다. 나라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는 기쁘고도 숭고한 과정인 것이다. 길고 길었던 삶이 완성되는 자리가 슬픔과 탄식으로만 얼룩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의 죽음을 애도함과 동시에 진심으로 축하받고 싶다.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살아온 사람인지를 확인하고 싶다.

 오늘 길을 걷다 벚꽃나무를 보았다. 벚꽃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꽃이 핀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가지는 벌써 앙상했다. 탄생의 계절 봄이지만 벚꽃의 탄생은 연장하지 못하는 듯했다. 가지가 앙상해질수록 더 많은 벚꽃 잎이 흩날렸다. 아름다웠다. 이보다 아름다운 소멸이 또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흩날리는 벚꽃 잎을 보니 나의 죽음은 어떠할까 싶었다. 나의 죽음도 벚꽃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까.

 찬란하게 부서져 내리는 벚꽃 잎처럼 내 삶도 아름답게 부서지길 바라기로 했다. 후회 없는 삶이었으니 그 마지막은 아름답게 부서지는 것도 나쁘지 않아. 영원한 건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기면 돼. 나는 영원하지 못한 채 사라지지만 그건 영원할 수 있을 것 같다. 추운 겨울에도 벚꽃을 기억하는 우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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