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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형주 David Lee Jan 12. 2019

인물과 시대는 어떻게 전시되어야 하는가

올려다보지 말고 주저앉아 흐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1919. 1. 12 AM 06:20


2019년에서 1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은 정확히 1919년 1월 12일 아침이다. 1919년 1월은 아마도 지금보다 더 추웠을 것이다. 일제의 탄압이 극심하던 시기, 저항과 분노는 누워 잠자던 새벽녘을 소스라치도록 이성을 깨워 차갑게 만들었을 것이고, 그 이성이 때를 기다려 눈이 녹아 땅을 딛고 걸을 수 있는 날을 맞이하였을 것이다.


2019년 올해는 아마도 이벤트의 해가 될 것 같다.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 전국 체전 100주년이 되는 해, 그리고 선거에서 이긴 전국의 지자체 장들이 잠시 숨을 골랐다가 올해는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생각과 철학을 표현하고 싶은 해가 될 터이니 말이다. 덕분에 나도 그동안 과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던 터였지만, 본의 아니게 요즘 항일 운동의 역사를 피부로 느끼는 시간이 되고 있다.


과거를 기억하는 기념관들의 공통점


최근 서울과 경기도 각 도시들의 항일운동을 기념하는 기념관과 추모공원, 기념비들을 여러 차례 답사하고 있다. 3.1 운동은 전국에서 전개되었지만 실상 항일운동의 특징은 도시마다 다 다르다. 서울은 민족대표 33인이 3.1 운동을 추동하였고 안성은 농민들의 무력항쟁을 통해 2일간 일본군을 내쫓은 남한 유일의 지역이다. 광주는 만해 한용운과 일본군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역사를 담은 나눔의 집이 있다. 또 양주는 한국의 아픔을 전 세계를 돌며 알린 조소앙 선생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는 곳이다. 각 지역의 기념관들을 돌며 보니 피상적으로만 알던 일제시대의 역사가 개개인의 이름마다 다 다른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기념관들을 쭉 둘러보며 아쉬운 점들이 많은 것은 오직 나뿐일까. 그 모든 콘텐츠가 오로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눈을 부릅떠 읽어야 할 작은 글자들의 패널이라는 점과,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도 않는 내레이션과 함께 틀어진 빔 프로젝터 영상들이라는 것이다. 군데군데 시대를 이야기하는 전시품과 디오라마 모형들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유리관에 갇혀 공감하기 힘든 해설 메모와 함께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유적비는 또 어떠한가.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우리나라에서 무언가를 추모하면 왜 무조건 높다란 '탑'을 세우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정말로 항일운동을 기념하는 모든 기념비는 목을 한껏 뒤로 꺾어 올려다봐야만 하는 천편일률적인 탑들뿐이다. 과거의 아픔을 꼭 탑으로만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러러봐야만 존경심이 생기는 것은 아닐 텐데, 그 표현 방식에서 사실 공감을 느끼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공감할 수 있어야 기억할 수 있다.


과거를 추모하는 성공적인 사례로 보통 두 가지를 든다. 지형의 고저차를 이용해 걸어가며 자연스레 눈높이가 희생자의 이름과 맞닿아 있게 설계한 미국 워싱턴의 '베트남 전쟁 메모리얼',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늘은 까마득해지고 마치 미로 속에 갇혀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기둥들의 나열 형태로 설계한 독일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 그것이다. 수많은 추모공원과 기념관들이 있겠지만 이 두 공원이 회자되는 이유는 모두 '공감'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는 것이다. 공감할 수 있으려면 눈높이와 맞닿아 있어야 한다. 올려다보게 하면 지극히 저항만 생길 뿐이다. 새겨진 이름들을 어루만지고, 주저앉아 그들의 아픔에 흐느낄 수 있도록 해야만 진정한 공감대가 형성된다. 시대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람들이 겪었던 슬픔과 아픔을 '공감'할 수 있도록 해야 자발적인 추모와 미래를 추동할 힘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공감되어야 기억할 수 있다. '공감'을 위해 디자인된 콘텐츠는 우러러 보지 않고 내려다 볼 수 있게 만들어진다.


애국보다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전시가 되어야 한다.


해외 사례는 차치하고라도, 항일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 이벤트들은 모두 '공감'할 수 있도록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것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나열이 아니다. 시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삶에 생채기를 만들어 힘겨웠을 그 시대의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는 애국보다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전시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사람, 한 마을의 스토리가 공감되어야 하고, 일방적 내레이션으로 전달하는 전시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1인칭 시점에서 콘텐츠가 만들어져야 한다. 나는 광주시에 마련된 '나눔의 집' 전시를 둘러보다 숨죽여 흐느끼는 어느 젊은 여성의 울음소리를 기억한다. 사실을 표현코자 하는 전시는 역설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담담히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우러러보지 말고 마침내 주저앉아 같이 아파하고 흐느낄 수 있는 전시가 올 한 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그것이 우리가 3.1 운동 100주년을 기억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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