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도서전이 보여준 오래된 건물의 쓸모

베뉴는 콘텐츠를 담는 그릇이다.

by 이형주 David Lee

서울국제도서전은 한국출판협회가 주최하는 국내 최대의 책 관련 전시회다. 출판사들이 부스를 통해 참가하고, 저자와의 북 콘서트 등을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는 전문 비즈니스 쇼라 할 수 있다. 이 도서전은 매년 새로운 주제와 기획전시를 결합하여 도서전만이 갖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였는데, 그 중심에는 바로 책이라는 콘텐츠가 있었다. 책만이 갖고 있는 무한한 스토리와, 아날로그적 감성이 충만한 물성(物性)을 통해 '책은 안 읽어도 도서전은 오게 만드는' 강력한 팬덤을 갖춘 전시회가 된 것이다.


그러나 도서전 역시 코로나의 여파를 피해 가기는 어려웠고, 올해는 기존 행사보다 축소되어 개최될 수밖에 없었다. 지난주에 끝난 2021 서울국제도서전은 코로나로 모든 마이스 이벤트가 축소되거나 온라인으로 전환되는 시점에 작은 비즈니스 쇼는 어떻게 기획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었던 좋은 사례이다. 코엑스라는 전형적인 행사 장소를 떠나 옛 공장의 모습을 간직한 성수동 에스팩토리에서 개최된 서울국제도서전은 언택트 시대의 산업 전시회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준 새로운 마이스 이벤트였다. 도서전은 어떻게 에스팩토리를 활용했을까?


서울국제도서전이 보여준 오래된 건물의 쓸모


서울국제도서전이 열린 에스팩토리는 오래된 공장을 리모델링하여 콘서트나 전시회의 장소로 활용 중인 복합 문화공간이다. 건물의 외관은 옛 공장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내부도 조명을 교체하고 일부 벽체를 튼 것 말고는 오래되고 빛바랜 흔적이 여기저기 묻어나는 성수동다운 공간이다. 이미 에스팩토리는 샤넬이나 빅뱅의 전시회 장소로 쓰일 만큼 유명해졌지만, 서울국제도서전은 문화와 비즈니스가 결합된 마이스(MICE) 행사가 어떻게 이러한 공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1. SIBF 마켓 - 인더스트리얼 감각의 부스 디자인


도서전의 꽃은 역시 출판사들의 부스를 방문하여 새로운 책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올해 도서전의 특징 중 첫 번째는 인더스트리얼 느낌의 새로운 부스 디자인을 도입하여 옛 공장의 모습을 간직한 공간과 매칭 시켰다는 점이다. 각 부스는 산업현장에서 볼트나 너트를 결합하여 쓰는 철제 프레임을 기둥으로 사용하고 입간판 역시 프레임과 조화를 이룬 블루 컬러의 아크릴 재질을 활용하였다. 기존 코엑스나 킨텍스 같은 전문 전시장이었다면 다소 생경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에스팩토리의 공간 특징을 잘 반영한 부스 디자인으로 전혀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KakaoTalk_20210912_202904105_14.jpg 인더스트리얼 느낌의 참가 기업 부스

2. SIBF 기획전시 - 책> 종이> 나무


올해 도서전은 총 3개의 기획 전시회를 산업전과 동시 개최하였는데 도서전의 역사를 돌아보는 <긋닛>, 웹툰 웹소설 특별전시인 <파동>,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을 선보인 <BBDWK>가 그것이다. 이 3개의 기획전은 동선상 산업전인 SIBF 마켓보다 먼저 관람객들에게 노출되도록 유도하여, 매년 달라지는 도서전의 주제와 산업 트렌드를 관람객들이 먼저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기획전의 오브제를 표현하는 테이블이나 패널을 모두 나무와 골판지 등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단순히 친환경 소재를 썼다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책의 물성을 이루는 종이가 나무에서 왔다는 원형적 접근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KakaoTalk_20210912_202904105_26.jpg 기획전시의 재료는 나무와 골판지를 사용하였다.

이렇게 나무와 종이의 원 질감을 그대로 노출시킨 전시는 다소 거칠고 투박할 수도 있지만 공간의 날것 느낌과 어울려 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 조화로움은 부스 참가기업을 알리는 배너를 무심한 듯 전기 배전함 옆에 붙여버린 담대함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공간이 가진 비전형스러움이 이러한 자유를 만들었으리라.

KakaoTalk_20210912_202904105_12.jpg 서울국제도서전 참여기업 안내 배너

3. 책도시 산책 - 베뉴를 넘어 도시로


코로나 이후의 마이스 이벤트는 Small & local contents 위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로컬의 미래'의 저자 헬레나 노르베지 호지는 "진정한 지역화는 소규모 활동을 대규모로 하는 것이다. 비슷한 경제 테마를 가진 전 세계의 로컬 도시와 협력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것이 로컬의 미래이다."라고 밝혔는데, 서울국제도서전은 바로 이 로컬의 대규모화를 실천한 사례이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 도서전은 <책도시산책>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독자가 산책자가 되어 전국의 다양한 서점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서울국제도서전의 주제인 '긋닛'에 맞춰 큐레이션 된 책과 강연, 전시가 전국의 서점에서 동시 개최된 것이다. 독자는 제공되는 종이 지도에 방문 서점의 스티커를 붙이면 다양한 선물까지 받을 수 있다. 단순히 성수동의 에스팩토리에서 관람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국의 서점을 연결하여 책을 경험하는 문화를 확대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로컬 비즈니스의 대규모화가 아닐까.

책도시산책.png 서울국제도서전의 <책도시산책> 프로그램 참여 지도

베뉴는 콘텐츠를 담는 그릇이다.


똑같은 음식이라도 어떤 그릇에 담기느냐에 따라 그 풍미와 격이 달라지듯, 행사 콘텐츠 역시 어떤 공간에서 개최되느냐에 따라 그 기획의도와 정서가 달라질 수 있다. 올해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은 이렇게 콘텐츠가 공간에 따라 기획 방식과 전달되는 의도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일 것이다. 과거 코엑스에서 개최되었던 도서전이 전문 비즈니스 쇼에 가까웠다면, 성수동 에스팩토리에서 열린 행사는 작가와 독자, 출판사가 보다 더 가까워지고 친근해지도록 기획된 행사였다. 그것은 단순히 성수동으로만 집객을 유도한 것이 아니라 전국의 서점을 네트워크로 연결하여 그 주제를 도시로 확장했다.


코로나의 여파로 작아진 행사였지만, 어쩌면 그 작아짐은 몸짓을 더 경쾌하게 만들어 참여자와 기업, 예술가 간의 협업을 더욱 가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베뉴가 달라지면 같은 콘텐츠라도 어떻게 창의적으로 기획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좋은 행사였다. 기획한 모든 이들에게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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