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더구나 어제보다도 한참 이른 시간이다.
바로 어제만 해도 시끄럽게 울어대는 휴대폰 알람 소리가 마뜩잖아 잽싸게 눌러 끄고는 두어 시간은 더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어제 일을 교훈 삼아 아예 지난밤 잠들기 전에 알람을 꺼두었다. 그런데도 무슨 징조라도 알리려는지, 오늘은 이 비루한 몸이 눈치도 없이, 주인은 바라지도 않은 짓을 알아서 척척 하는 것이다. 그대로 꿈쩍 않고 누운 채로 다시 눈을 감아 보았지만, 어쩐지 다시 잠이 올 것 같지는 않다. 손바닥을 활짝 펴 볼을 몇 번 문지르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섰을 땐 겹겹이 쌓인 어스름이 여전히 두껍게 내려앉은 새벽이었고, 도시는 깊은 잠에서 허우적거리던 중이었다.
숙소에서 곧장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길이 나뉘는 곳에서는 두리번거리다 흘깃 눈이 마주친 골목 안으로 들어가 보기도 하고, 별 것 없으면 또 그 골목에서 이어지는 다른 골목으로 나서기도 하면서. 이 골목 저 골목 그저 그 순간 내키는 대로 무작정 넘나들었다. 그랬더니 어느 골목에서는 때 이른 인기척에 선잠이라도 깼는지 짜증 섞인 개 울음소리가 담을 넘어 메아리친다. 모른 척 슬그머니 돌아 나온 다음 골목에서는 발소리에 놀랐는지 한 켠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고양이가 후다닥 튀어나와 발끝을 가로질러 도망간다. 그렇게 벌써 몇 개의 골목을 지나왔는지 모르겠다. 그저 이번 골목에서는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공기가 좀 텁텁한 걸 보니 바다가 가까워진 모양이네 그런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저만치 앞 집 문이 덜컹, 끼익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파리하고 검푸른 새벽 속으로 두 사람이 들어왔다. 그냥 ‘엄마와 딸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잠시 걸음을 멈췄다. 먼저 나와 매무새를 정리하던 엄마는 뒤따라 나선 아이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잠이 덜 깬 듯 연신 눈을 비비던 아이도 이내 팔을 뻗어 엄마 손을 맞잡았다. 엄마가 걷기 시작했고 아이도 종종걸음으로 따라나섰다. 성큼성큼 내딛던 엄마의 보폭이 눈에 띄게 좁아졌다. 아이가 발아래를 곁눈질하더니 잰걸음 몇 걸음을 걸어 어미의 걸음에 제 발걸음을 맞춰 걸어간다.
바람도 기척 없고 파도마저 아직 숨죽인 서슬 퍼런 새벽의 한가운데로 성큼 나아가는 두 개의 그림자. 오도카니 서서, 가로등 아래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불현듯 그날 새벽 생각이 났다. 이 낯선 길 위에서 왜 하필 그날이 떠오른 것인지 나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내게는 이미 9년째 흐르고 있는 ‘엄마가 없는 새벽’. 그날, 그 새벽도 지금처럼 무겁고 짙은 파란 새벽이었던가? 온갖 혜택을 스크립트에 맞춰 피아노 '솔'음으로 늘어놓는 통신사 광고, 저이율 고한도를 강조하는 대출 홍보문을 기계음으로 줄줄 쏟아 낼 뿐인 전화 따위를 제외하면, 일주일에 한 번 울리기도 버거운 전화기 벨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롭게 울어 대며 고요한 새벽을 할퀴고 있었다.
화면에 표시된 이름을 보고, 나는 연결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마지막 통화가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긴 공백을 깬 동생의 이름이었다. 요동치는 가슴을 꾹꾹 눌러가며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두서없이 말했다. 처음엔 엄마라고 했다. 그러고는 앰뷸런스라 했다. CPR을 하고 있다고도 했다. 이어지는 말이 있었는데 내가 알아듣지 못했던 것인지, 그 말 이외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던 것인지 다시 떠올려 봐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동생은 정신이 아득히 나가 있는 듯했고 대답을 구할 정신도 없는 듯했다. 나도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여전히 흘러나오던 전화를 끊고 나서야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대로변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에 걸려 대기 중이던 택시에 무작정 올라탔다.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은 하나였다. 내가 도착할 때까지 만이라도.
동생의 연락을 받았던 그 새벽이 오기 몇 달 전, 딱히 이유가 없어도 가끔 한 번씩 들르면 좋겠다는 잔소리를 받아들여 부모님 댁으로 내려갔다. 그저 가볍게 안부만 전하고 말았으면 좋았을 텐데 별 것 아닌 화두에서 말다툼이 시작됐다. 나는 일부러 모진 말로만 골라 내키는 대로 쏟아붓고는 그대로 돌아서 방을 나왔다. 허겁지겁 따라 나온 엄마가 신발을 신고 있던 내 어깨를 잡아당겼다. 언제나 내가 이기는 싸움이었다. 거의 매번 결국 먼저 손을 내미는 건 엄마 몫이었음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도 며칠은 걸렸고, 그럴 때마다 ‘엄마한테 먼저 져 주면 좀 어때서’라는 투정 정도로 마무리되는 것이 모자 다툼의 정해진 결말이긴 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날은 바로 따라나선 것이다. 갈 때 가더라도, '밥은 먹고 가'라 했다. 그 말을 매정하게 팽개치고 나는 집을 나섰다.
해가 뜨지 않기를 바라고 바랐던 그날 새벽, 무심하게도 시간은 똑같이 흘렀고 한치 어김없이 아침은 찾아왔다. 어제만 해도, 꿈에도 떠올려 보지 않은 아침이었다. 생각했다. 엄마가 내밀었던 마지막 손을 잡아야만 했다고. 그날 그 새벽이 거르지도 않고 아홉 번을 꼬박꼬박 찾아오는 동안, 엄마는 아직 꿈에서 조차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우습게도 한동안 엄마가 나를 찾아오지 않는 것이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한심하다. 한심했다.
날카로운 색의 경계를 기어이 넘어, 파도는 후회가 되어 거세게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