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언론은 자국 내 홍수로 인한 인명 피해를 주요 뉴스로 다루며 많은 지면과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피해는 분명히 안타깝고 보도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간, 팔레스타인에서는 훨씬 더 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고 있음에도 그 죽음은 간략한 통계나 배경 설명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보도의 우선순위나 지리적 거리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이면에는 누구의 생명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누구의 고통을 더 많이 느끼는가 하는 감정적 위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까운 이의 고통에는 쉽게 감정이입을 하지만, 멀리 떨어진 타인의 죽음은 숫자로 소비되기 쉽습니다. 이처럼 심리적 거리감은 공감의 강도를 결정짓고, 언론은 이를 전파하고 증폭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어떤 죽음은 이름과 이야기를 부여받고, 어떤 죽음은 통계로만 남는 현실은 바로 이러한 감정의 구조 속에서 나타납니다.
이러한 구조를 철학적으로 조명한 개념이 바로 조르조 아감벤이 말한 ‘호모 사케르’입니다. 호모 사케르는 고대 로마법에서 비롯된 존재로, 죽일 수는 있지만 법적·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는 오늘날 국가가 필요할 때마다 특정 집단을 예외 상태로 놓고 법의 테두리 밖으로 밀어낸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예외 상태는 단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통치의 도구가 됩니다. 팔레스타인은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시민권도 제한된 채 수십 년째 폭력의 예외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 안에서 민간인은 구조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반복되는 폭력 속에서 그 죽음은 점점 ‘불가피한 희생’으로 중립화됩니다. 이는 단지 법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이고, 기억의 문제이며, 결국 인간성의 문제입니다.
미디어는 생명을 기록하는 수단이지만 동시에 생명을 서사화하고 구분 짓는 권력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은 드라마로, 또 다른 누군가의 죽음은 통계로 처리되는 이 불균형은 단지 관심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떤 생명을 기억하고, 어떤 죽음을 잊는가는 곧 우리 사회가 어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죽음이 점점 익숙한 비극으로 소비되고, 더 이상 놀랍지도, 아프지도 않게 되는 그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아감벤의 말처럼 호모 사케르는 법의 개념일 뿐 아니라 감정적이고 문화적인 현실입니다. 그들은 단지 제거되는 생명이 아니라, 더 이상 애도받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모든 생명이 존엄하다고 말하면서, 어떤 죽음에만 눈물 흘리고 다른 죽음에는 침묵하는 이 모순을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또 다른 배제이며, 무관심은 폭력의 동조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다움의 마지막 선을 지키기 위한 행위입니다. 언제든 우리도 말해지지 않는 생명이 될 수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로소 세계를 조금 더 윤리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