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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책임성

by 최정식

세상을 살아가며 가장 강력한 힘은 무엇일까요. 경쟁력, 권력, 지식… 많은 답이 있겠지만, 실은 ‘은혜’일지도 모릅니다. 이유 없이 베풀어진 자비, 아무 대가 없이 건네진 손길, 설명되지 않는 용서—이 은혜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뿌리를 흔듭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은혜는, 받은 순간부터 책임이 되어 우리를 일으키고, 시험하며, 변화시키는 힘이 됩니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께서는 용서받은 종의 이야기를 통해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용서받은 자로서, 왜 용서하지 못하였는가?” 받은 자비가 그 안에서 죽어버렸을 때, 그는 다시 심판받는 자가 됩니다. 은혜는 정체되어 있을 수 없습니다. 흘러야만 하고, 나누어야만 살아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은혜의 책임성'이라는 인간의 윤리적 명제가 놓여 있습니다.


삶의 굴곡을 지나며 우리는 무수한 용서와 배려를 받습니다. 그것은 부모로부터일 수도, 친구로부터일 수도, 때로는 말없는 타인으로부터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은혜 앞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입니다. 그저 ‘감사하다’는 말로 끝내야 할까요? 아니면 그것을 다시 다른 누군가에게 건네주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현대 사회는 자격을 따지고, 실리를 계산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계산으로 설명되지 않기에 더욱 강력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나누지 않을 때, 그 안에 있던 생명력은 죽어버리고, 오히려 책임으로 돌변합니다. 말하자면, 은혜는 멈추는 순간 무게가 됩니다. 그리고 그 무게는 우리 자신의 양심을 눌러옵니다.


그러므로 삶을 ‘받음’에서 ‘흘림’으로 전환시킬 때, 비로소 우리는 은혜의 본래 목적에 닿게 됩니다. 받은 것을 내어주는 것, 용서받은 것을 다시 용서로 돌려주는 것, 그것이 바로 은혜의 책임성을 살아내는 길입니다.


이 시대는 자격을 갖춘 자보다, 은혜를 받은 자답게 사는 사람을 더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받은 자비가, 오늘 누군가에게 또 다른 생명의 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무게를 감당하는 품격 있는 삶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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