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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복원

by 최정식

문득, 삶이 어딘가에서 미끄러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해야 할 일은 많고, 하루는 모자라고, 자신은 자꾸만 지워지는 것 같고. 그렇게 ‘사는 것’과 ‘살아지는 것’ 사이에서 점점 존재감을 잃어갑니다. 그런 삶의 흐름 속에서, 9일간의 휴가와 한가로운 오후의 쇼파 위는 단순한 여유를 넘어선 깊은 통찰의 기회가 됩니다.


많은 분들께서 휴식을 ‘무언가를 하지 않는 상태’로만 여깁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존재’를 회복하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게으름이 아닙니다. 외부 세계가 부여한 역할과 임무, 기대의 껍질을 잠시 벗고 나 자신이라는 이름으로 숨 쉬는 시간입니다.


현대 사회는 성과와 속도를 가치로 삼습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생산성과 효율성으로 평가받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만 살아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삶은 ‘하는 것’보다도 ‘존재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존재의 복원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존재하기 위해 쉬는 시간’—그것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Dasein(현존)'이라 불렀습니다. 단지 생물학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스스로를 자각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각은 늘 바쁜 일상 속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고요함이 있어야 들을 수 있고, 멈춤이 있어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긴 휴가, 조용한 오후, 그리고 쇼파 위의 침묵은 그래서 소중합니다. 그 안에서 삶은 다시 온전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존재의 복원이란, 단지 휴식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이름을 다시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복된 존재는 다시 일상으로 나아갈 힘을 갖게 됩니다. 일이 의미를 되찾고, 관계가 따뜻함을 회복하며, 삶이 단지 반복이 아닌 깨어있는 경험이 됩니다.


삶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고 느껴진다면, 잠시 멈추어 보시길 바랍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존재 그 자체로 머무는 시간을 스스로에게 허락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 순간, 삶은 비로소 다시 숨 쉬기 시작할 것입니다. 존재의 복원은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깊이 다시 살아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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