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제나 실체를 붙잡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야말로 가장 오래된 착각일지 모릅니다. 실체와 가상을 떼어 놓은 뒤, 그 가상을 실체라 여기는 순간, 인식의 방향은 거꾸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본래는 실체가 가상을 규정해야 하지만, 어느새 가상이 실체를 대신하여 현실의 주인 행세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실재의 전도’입니다.
플라톤의 동굴 속 사람들은 벽에 비친 그림자를 진실로 여겼습니다. 그들에게 그림자는 단지 모사된 형상이 아니라, 세계의 전부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습니다. 숫자와 통계, 이미지와 여론, 그리고 각색된 이야기들은 원래 가리켜야 할 실체를 지워버리고,
오히려 실체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 과정은 조용히, 그러나 완벽하게 이루어집니다.
심리적으로도 가상은 매혹적입니다. 실체는 불편하고 불완전하며, 때로는 직면하기 두려운 진실을 품고 있습니다. 반면 가상은 다루기 쉽고, 안전하며, 마음속 세계와 어긋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가상의 품에 머물며, 그것을 실체로 승인합니다. 문제는 이 상태가 길어질수록, 실체를 마주할 힘이 서서히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현실과 조우할 용기가 약해지면, 판단은 그림자 속에서만 이루어지고, 그 결과 삶 전체가 왜곡됩니다.
사회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뉴스 화면과 통계 수치, 미디어의 편집된 장면이 우리에게 ‘현실’이라 불립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현실인지, 아니면 가상으로 재가공된 모형인지 구별하려는 노력은 점점 사라집니다. 결국 집단적 인식이 가상에 점령당하면, 실체는 사회적 기억 속에서조차 희미해집니다.
실재의 전도는 단순한 인식의 오류가 아니라, 존재의 방향이 거꾸로 선 상태입니다. 그림자가 주인이 되고, 실체가 배경이 되는 순간, 우리는 현실을 잃고도 잃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됩니다. 따라서 이 시대의 과제는 명확합니다. 가상과 실체를 구분하는 눈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그림자의 지배에서 벗어나, 다시금 현실의 빛을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