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바유루 총리의 퇴진은 단순히 정권 불안정의 사례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번 사태는 제5공화국 체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 한계를 드러내는 장면이며, 프랑스 정치의 본질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정치는 강력한 국가주의와 혁명적 사회 충동이라는 두 전통 사이의 긴장 속에서 움직여 왔습니다. 지난 200여 년 동안 프랑스는 질서와 격변 사이를 진자처럼 오가며 균형을 모색해왔고, 현재 상황은 그 균형이 다시 흔들리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드골이 1958년 제5공화국을 설계한 이후, 대통령 중심의 체제는 국가의 안정과 통합을 보장하도록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2022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의회 다수파 지위를 상실하면서 이 구조는 균열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를 만회하고자 조기 총선을 단행했지만, 결과는 ‘패배자들의 연정(coalition of losers)’이었습니다. 그 결과, 소수 정당에 의존하는 불안정한 정부가 등장했고, 바유루 총리의 퇴진은 이러한 제도적 피로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기의 본질은 제도적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정치적 혼란의 이면에는 국민과 정치 엘리트 사이의 깊어지는 괴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긴축 성격의 예산안, 불충분한 호스피스와 완화의료 체계, 복지 축소는 국민에게 정치가 더 이상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불신을 강화했습니다. 이러한 공백을 파고든 세력이 극우 국민연합(RN)입니다. 이제 국민연합은 더 이상 주변적 세력이 아니라, 재계와 유권자를 결집시키는 실질적 대안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프랑스 국내를 넘어 유럽 전체에 파급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프랑스는 독일과 함께 유럽 통합의 양대 축을 이루어 왔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정치가 장기간 마비 상태에 빠질 경우, 유럽연합은 우크라이나 지원, 대중국 정책, 에너지 안보와 같은 주요 사안에서 결속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극우 세력이 프랑스 집권에 성공한다면, EU의 대러 제재 정책은 균열될 가능성이 높고, 나토의 전략적 일관성 역시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이는 대서양 동맹 전체에도 큰 도전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결국 현재의 프랑스가 직면한 문제는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강력한 국가주의와 혁명적 민심이라는 두 전통을 어떻게 다시 조율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키신저의 말처럼 국제정치에서 합법성은 단순히 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국내적 합의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프랑스는 지금 그 두 기반을 동시에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2027년 대선을 앞두고 마크롱 대통령, 혹은 그의 후계자가 균형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프랑스는 더 이상 유럽의 안정 축이 아니라 혼란의 진원지가 될 수 있습니다. 이번 정치적 침체는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유럽의 미래 질서를 가늠할 중대한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