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미국을 떠나 뉴질랜드에 정착하겠다는 인터뷰를 접하며, 불편함이 밀려왔습니다. 정치적 선언이나 유명 인사의 이주 소식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정신을 지키기 위해 환경을 바꾼다”는 그의 말이, 조직 안에서 제 선택과 태도를 비추었기 때문입니다.
조직에서 느끼는 불편함은 누군가가 자리를 옮겼다는 소식, 혹은 더 이상 이 방식은 맞지 않다고 판단했다는 말을 들을 때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자주 불편해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다른 사람의 불평을 마주할 때입니다. 회의 뒤에 흘러나오는 한숨, 반복되는 불만, 체념에 가까운 말들. 그 말들이 과장되었다고 느껴질 때도 있지만,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들여다 보면, 불평이 틀려서가 아니라 너무 이해되기 때문이라는 데 닿습니다. 불평은 문제를 새로 만드는 말이 아니라, 이미 감당되고 있던 균열을 언어로 드러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불평은 제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그 불평이 조직을 흔들어서가 아니라, 제가 이미 감당하고 있던 것들을 정확히 짚어내기 때문입니다.
이해된다는 사실은 곧 질문을 부릅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감당하고 있는가, 왜 말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조직은 남아 있는 선택을 책임과 헌신의 언어로 설명하지만, 실제 일상은 설명되지 않은 기준을 묵묵히 견디는 시간에 더 가깝습니다. 그 위에 누군가의 불평이 얹히면, 불편함은 배가됩니다. 견딤이 미덕인지, 침묵이 방조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기 때문입니다.
카메론 감독의 선택이 불편했던 이유도 이와 닮아 있습니다. 그는 싸우지 않았고,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환경을 바꾸었습니다. 그 결정은 조직 안에서 늘 마주하게 되는 질문을 정면으로 꺼냅니다. 끝까지 남아 버티는 것이 언제나 옳은가, 불편함과 불평을 개인의 문제로만 돌려도 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불편함은 제거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붙들어야 할 신호라고 느낍니다. 다른 사람의 불평이 불편하게 들린다면, 그 말은 조직을 공격하는 소음이 아니라, 제가 감당하고 있는 질서의 한계를 알려주는 알림일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그 불편함은 묻습니다. 지금 이 조직에서 무엇을 감당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감당의 이유를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그 질문을 외면하지 않는 한, 이 불편함은 조직 안에서 제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증거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