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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의 고요

by 최정식

종이 위로 검은 글씨를 옮겨 적을 때면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멈춘다. 펜 끝에서 스치는 미세한 마찰음, 잉크가 스며드는 섬유 사이의 숨소리, 한 획 한 획 따라가는 눈동자의 떨림까지 성경을 필사하는 시간은 고요의 맥박을 따라 숨을 고르는 의식이다.


첫 장을 펼치면 마치 고대 사막의 모래알이 손끝으로 흘러내리는 듯하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문장을 쓸 때면, 그 말씀의 무게가 잉크로 변해 종이에 스며든다. 각 글자는 시간을 가르는 조각이 되고 문장은 강물처럼 흐른다. 이 과정에서 나는 단순한 필사자가 아니라 흔들리는 마음을 한 줄씩 다듬어 가는 목공이 되고, 신의 언어로 지도를 그리는 탐험가가 된다.


현대인에게 고요는 사치다. 알림 소리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마음, 멀티태스킹에 지친 영혼은 필사라는 단순한 반복 앞에서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손가락이 성경 구절을 따라가면, 두뇌의 회전 속도가 손동작에 맞춰 느려진다. 스크롤에 길들여진 눈이 획의 굴곡을 읽고, 키보드에 무디어진 손이 잉크의 온도를 기억한다. 이는 디지털 시대에 잃어버린 아날로그적 치유다.


이제 필사가 끝난 페이지를 넘길 때면 마치 백색 소음 사이로 흘러나오는 침묵의 멜로디를 듣는 기분이다. 잉크로 새겨진 말씀들은 고요의 화석이 되어, 다음 폭풍이 올 때를 대비해 선반에 차곡차곡 쌓인다. 타자기 소리처럼 정확하지도, AI 생성 글처럼 완벽하지도 않은 이 손글씨의 흔적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기도임을, 종이 위에 맺힌 잉크 얼룩이 증언한다.


고요는 비우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기술이다. 성경 필사는 내면의 울림을 잉크로 번역하는 작업이다. 마치 별빛이 광년을 건너와 종이 위에 도착하듯, 영혼의 파장이 글자로 응결되는 시간, 펜을 놓을 때마다 나는 고요라는 이름의 성찬식에 참여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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