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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미 Jan 25. 2022

마흔 둘, 꿈을 꾸다

 "추리 소설 쓰면 딱 좋겠다"


  고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이 나에게 했던 말이다. 실없는 농담을 즐기시던 선생님이셨다. 그때는 농담이라며 피식 웃고 말았지만, 25년이 지나온 시간에도 그 순간이 짙은 윤곽으로 기억된다. 



  초등학교 때 였다. 형편없던 나와 오빠의 성적표에 화가 나신 아버지는 8살, 10살 어린 남매를 붙들고 공부를 시작하셨다. 아버지는 매일 밤 진급 시험공부를 하셨고, 나와 오빠는 초등학생 교과 공부를, 그때 시절로 정확히 얘기하자면, '국민학교' 공부를 하였다. 밤 12시 또는 새벽 2시까지 깨어있는 날들이 많았다.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졸기라도 하면, 두꺼운 책을 들고 벌을 서야했다. 8살의 나이에 느끼기에 내 인생은 너무 피곤하고, 팔이 아팠다. 

  그 후  대부분의 시간을 우등생으로 살았다. 습관이 또 다른 패턴을 만들었고, 그렇게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적당한 노력과 운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고, 대학에서도 그저 적당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다. 처음으로 이력서를 제출했던 직장에 바로 취직이 되고 5년여의 시간동안 근무했다. 


  26살의 나에게, 결혼 하자고 졸라대던 남자 친구를 거절하지 못해 등떠밀리 듯 결혼을 했다. 그 후 2년이 지나니, ... 왜 아이를 안 가지냐, 아이 낳으면 다 키워주고 할 테니, 걱정 말아라는 시어머니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다. 임신, 출산, 육아 휴직 그리고......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퇴사 전 잠시 시어머니께 아이를 맡긴 적이 있었다. 시부모님은 내가 직장에서 돌아와 아이를 안으러 갈 때마다 "회사는 언제까지 다닐 거냐?"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지"라고 주문을 외우셨다. 그리고 공식적인 나의 퇴사 후 마지막으로 아이를 데리러 갔던 날, 시어머니는  " 둘째는 네가 키워라, 앞으로 아이 안 키워주겠다" 라고, 굳이 뾰족한 말을 하시며 나와 아이를 돌려보냈다.  


  독박 육아에 지쳐가고 있을 때,  남편이 겁없이 차린 사업장에 일 할 사람이 없어 (따로 사람을 쓸 여유가 없었다),  세무, 회계, 법무, 총무 모든 일들을 도맡았다. 첫째는 하원시간이 되면, 유치원 버스를 타고 사무실에 내렸다. 저녁 늦게까지 정리하고 나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6살 아이와 집으로 돌아갔다. 씻기고, 재우고 나면, 또 다시 같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얼마나 그런 일들이 있었고, 그 놈의 선택에 대한 대가를 내가 치러야 했었다. 그래도 시간이 좀 많이 지나고 나니, 더 이상 직원들 월급 주자고 아버지와 오빠에게 돈을 빌리는 일들이 줄어들었다. 마이너스 통장이 조금씩 줄고, 통장에 마이너스가 찍히지 않는 날도 조금씩 생겼다. 


  먹고 사는 걱정이 조금 줄어드니, 행복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나는 행복한 엄마가 아니었다. 하지만, 매일매일 아이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행복할 줄 아는 사람으로, 스스로 행복함을 찾을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행복하지 않은 엄마는 매일 아이들이 행복을 알며,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문득 나의 엄마가 생각났다. 나도 모르게 자주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속의 불안감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나는 태국에서 혼자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먼 곳에서 혼자 고생한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나는 행복해졌다".  아이들이 주는 기쁨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더 행복해지기로 매일매일 다짐한다. 

*파타야 해변 'Glass House' 식당에서 수박, 망고주스와 행복했던 하루




  행복한 엄마가 되자.



  마흔 살이 넘은, 아이 키우는 여자가 취직하기는 태국에서도 쉽지는 않았다. 어려운 기회가 생겨 취직을 했었다. 직급이 높지만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나를 향한 불편함이 크고, 커졌다... ...  나보다 나이가 많이 어린 직원들도 있었다. 그들도 내가 편하지 않았다. 그 불편감이 커지고 또 커지더니, 그것이 내 잘못인 듯이 느껴졌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비난과 책망들에 짓눌려서, 다시 사직서를 썼다. 지금은 내 자리를 대신 할 사람을 기다리며, 여전히 불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슷한 방향에 살고 있는 20대 초반인 신입사원과 출퇴근 길을 함께 했었다. 푸릇한 A가 내게 물었다. 


  "팀장님은 꿈이 있으세요?"

   

   "음.... 있어요....(피식) 좀 엉뚱하긴 한데, 나는 글을 쓰고 싶어요."

  

  누군가에게는 말해보고 싶었던 내 마음이었다. 이제 막 만난, 나랑은 다른 시대를 사는 듯한 어린 아이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오래되어도 잊히지 않는 기억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모든 학창 시절을 통틀어 가장 좋아했던 선생님, 하광복선생님.

  그 시절에는, 고등학교 입학 후에 전교생 대상으로 IQ Test를 했다. 평범했던 테스트 결과지에 단 한 가지 부분, '추리 상상 능력' 은 만점이었다. IQ 검사지를 받으려면 담임선생님과 개별 면담을 했어야 했는데, 하광복 선생님은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시고, 검은 안경테를 치켜올리며 말씀하셨다. 


  "이게 왜 이렇지? 희안하네. 너는 추리 소설 작가 하면 딱 좋겠다."

  


  

 

  벌써 마흔 둘, 

  내 꿈은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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