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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버랜드를 찾아서 Jan 25. 2022

태국살이, 어느덧 5년차

   나는 아이들과 태국에 살고 있다. 


  고향은 경남 진해요,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은 강원도 동해이다.

  "옛말에 말은 키워서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키워서 서울에 보내라고 했다" 

  대학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말 얘기를 꺼내신 엄마의 진지한 농담에, 합격했던 대학 중에 서울에 있는 곳을 골라 입학하였다. 

  전라도 사람을 만나니 전라도 사투리가 나오고, 경상도 사람을 만나니 경상도 사투리가 툭툭 튀어나오는 내가, 친구들은 이상했다. "아버지는 전라도 토박이요, 어머니는 경상도 토박이시고, 나는 경상도 출생, 오빠는 전라도 출생, 지금 부모님 사는 집은 강원도지만, 나는 지금 서울에 있네요" 라며 별거없는 자기 소개를 길게 늘어 보였다. 

  서울이라는 곳으로 가는 길이 너무 멀고, 고되었다. 촌스러운 내가 서울보다 더 멀리 가 볼 거라고는, 인생 한 자락 어느 날에, 낯선 곳에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대도시에서 살고 있어서 였을까? 세상이 너무 빨리 발전하고 있는 탓일까? 

**아속 Sofitel 에서 내려보는 전경


  해외 여행 가는 일도 많아졌고, 해외 출장도 다녔다. 점점 일본이 친근해지고, 중국 가는 길이 친근해지고, 그러다 어느날, 엊그제 이혼하자던 남편이, 손바닥 뒤집듯 바꾼 마음에 이끌려서, 태국이라는 나라에 살아보자고 왔다. 멋진 곳에 가서 살면 다 좋아질 것이라는 그 놈의 말과는 다르게 힘들었던 첫 태국 생활이었다. 취업 사기를 당하고, 회사에서 임대해줬다는 주택에는 문, 화장실, 창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월급은 아직이지만, 2살 딸아이를 굶길 수는 없어서 통장에 찔끔 있는 돈을 환전하고, 마트 푸드코트에서 끼니를 떼웠다. 태국의 빅씨라는 큰 마트였는데, 매일 바퀴벌레가 식탁 위로 기어오르거나, 음식 주문하는 곳은 그것들의 런웨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매일매일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 놈의 생각은 달랐다. 해외에 일하러 간다며, 어깨를 으쓱이며 한국 땅을 떠나온 것이 발목을 잡아 끌었다. 덥고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수돗물을 틀어놓고, 자그만 간이수영장에 물을 담아 아이의 하루하루를 채웠다. 1년 여의 시간 후에 그 놈을 그 곳에 남겨두고, 나는 아이와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태국에서 지내는 건 많이 외로웠었다. 그러다 다시 돌아온 고향은 더 날카로웠다. 한국에서도 혼자였다. 


  아이를 데리고 주말나들이를 가면, 많고 많은 사람들이 가족 단위였고, 엄마 혼자 아이를 데리고 유모차에, 도시락 짐을 짊어지고 나온 사람을 마주하기는 쉽지 않았다. 사람이 넘치는 공간에서, 나에게 부족한 것만 보였다. 나랑 덩그러니 앉아있는 아이를 보면 가슴이 쿡쿡 쑤씨는 것처럼 아팠다. 주말에 그냥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자고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딸아이는 평소와 다르게 친구들이 없는 놀이터가 재미없었다. 그렇게 그곳에서 사는 동안, 더 많이 아팠다. 


  얼마 후 그 놈도 한국으로 돌아왔고, 일상이 틀을 잡아갈 때 쯤 다시 태국으로 가고 싶어졌다. 당당하게 외롭고 싶었다. 


  초등 학교 여름 방학이 시작되고 어느날, 2개의 비행기표를 사서 공항으로 갔다. 여행가방 4개를 들고 다시 한국을 떠나왔다. 그때의 나는 더 멀리 가서 살고 싶었었다. 


  두번 째 긴 여행은 달랐다. 잠시 지인의 집에 짐을 풀었지만, 쉬지 않았다. 다시 집을 만들어야 했다. 부지런히 돌아다녀 작은 콘도를 계약하고, 그 곳에 짐을 채워넣겠다고 분주하게 다녔다. 숟가락, 그릇, 냉장고, 책장, 이불... ...  최소한의 것들만 샀는데도 힘이 들었다. 

  한국에서 초등학교 2학년인 아이를 미국계 국제학교에 입학시켰다. 영어로는 간단한 인사만 할 줄 알던 큰 아이는 매일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가 보고싶다." "한국에 가고싶다." 우는 아이를 보듬어 안으면, 굳게 먹었던 마음이 다시 무너졌다. 이제 9살인 아이는 동네친구들이 그리웠고, 그렇게 매일 울었더랬다. 

  큰 아이를 안고 같이 잠들고, 아침에는 손을 잡고 학교에 데려다 줬다. 그리고 스쿨버스를 타고 다니기 시작하고, 지금은 혼자서 택시를 타고 학교에 다닌다. ESL 반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 줄 알았는데, 2학기 만에 ESL을 나왔다. 친구들과 다 같이 수업을 듣게 되었다고, 기뻐하던 모습이 어찌나 기특했던지...


  그렇게 나는 꾸역꾸역 5년을 태국에서 지내고 있다. 매일 바쁘다는 남편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아도 되었고, 육아와 집안 일을 도와줄 사람을 저렴한 비용에 구했다. 음식 준비를 하면서 우는 아이를 업지 않아도 되었고, 큰아이 공부를 봐줄 때면 작은 아이는 TV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가끔 아르바이트 일로 밖에 나갈 때에도 아이들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이를 먹으며 점점 친구들이 줄었다. 그래서 였을까? 나는 늘 외로웠다. 왜 나만 혼자일까? 왜 나는 외로울까? 아이들을 재우고 누우면, 이런 생각들에 몸이 짓눌렸다. 누군가에게 연락하고 싶은데,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 너무 멀리 와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운 날도 있었다. 나는 여전히 외롭다. 하지만, 외롭다고 고민하는 일은 줄었다. 외로움에 사로잡혀 있던 머릿 속에, 꿈이라는 것, 변화라는 것들을 채워 넣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이제 막 중학생이 되는 큰아이와 마흔살이 넘은 엄마는 '무엇이 되고 싶은지?' 매일 함께 고민한다.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은 아이들과 혼자 외국에 살고 있는 내가 또 이상하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내 마음을 소개한다. 


  "멀리 지내는 게 외롭고, 힘들 때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여기와서 더 행복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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