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 다리

by 조성식

일제 강점기의 치욕과 한국전쟁의 산 증인으로 무수한 아픔과 슬픔이 새겨진 애환의 영도다리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짧게라도 부산의 흔적을 안고 있는 사람은 나름대로 영도다리에 대한 추억을 한 가지쯤은 간직하고 있지 않을까 자문해 보며 약 육십 년 전의 영도다리 풍경을 펼쳐 본다.


1.

그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영도다리 밑에는 수많은 점집이 자리 잡고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도 모자라 영도다리에서 자갈치로 가는 길가에는 점쟁이가 즐비했다. 어설픈 상자를 엎어 놓고 점이라는 깃발을 세워놓으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점을 보고는 했다.

피난민은 몸에 베인 익숙함과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안고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고향을 떠나와 낯선 타향에서 온갖 서러움을 안고도 살아야 했다. 차라리 죽는 게 편하다고 하면서도 차마 죽지 못해 살아야 하는 처절함이 편히 기댈 곳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밤마다 찾아드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멍든 가슴을 내려놓을 곳은 없었다. 살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으로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생선 비린내 속에 온몸을 절여야 했다.

쏟아지는 짠물을 둘러쓰고 얼어 터진 손등에 찬바람이 훑고 지나도 내일은 나아진다는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고 싶어서였을까. 악착 같이 살아야 하는 하루하루가 절망의 그림자와 씨름을 해도 내일에 대한 기대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절박함의 골이 깊을수록 나아지리라는 희망의 빛이 필요했기에 영도다리 주변으로는 점을 보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점집은 날씨와 시간의 구애 없이 하루 종일 사람들이 밀어닥쳐 항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용한 점쟁이일수록 앞날에 대한 예측보다 애간장이 타들어 가는 마음을 잠시라도 어루만져 주며 기대를 놓지 않게 해주지 않았을까.

몇 해 전 영도다리 밑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점집을 찾아갔다. 복채를 주며 점을 보기보다 지나간 역사를 물었다. 이상한 것을 묻는다고 꺼리다가 잠시 후 긴 한숨과 함께 쏟아내는 과거는 그동안 어디에서도 드러낼 수 없었던 가슴이 문드러지는 모진 응어리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한 맺힌 아픔을 어루만져 주었지만 정작 자신의 절절함은 어디에도 드러낼 수가 없어 가슴에서 곪아버린 애환 덩어리를 안고 있었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 점을 보는 사람도 없고 나이를 이기지 못해 한 집 두 집 떠나다 보니 모두가 떠났는데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자신만 남았다고 한다. 갈 곳이 없어 이렇게 떠나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다고 서글픈 푸념을 늘어 놓는다.


한창 성시를 이룰 때는 돈을 쌀자루에 담아 쌓아도 주체를 못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많은 돈을 다 어떻게 했느냐고 물으니 돈에 눈이 달려 쉽게 들어오면 집안에 있는 바가지가 밖으로 퍼 나른다면서 “휴~” 하고 길게 한숨을 몰아쉰다. 돈을 쌓아 놓으면 서방님이 한 자루씩 매고 나가 노름으로 다 날려버렸다고 속 곪은 한탄을 늘어놓는다. 피난민들이 들이닥칠 때는 새벽부터 줄을 서서 점을 보고는 했는데 화장실에 갈 시간도 없었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자신의 말이 그들에게는 곧 법이었다고 하며 얼굴에 열꽃을 피운다.

돈 욕심 많은 점쟁이는 뚜쟁이를 시켜 남의 점집을 돌아다니며 “어디 가니까 용하게 맞추더라,” 하며 입소문을 퍼트리는 수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무슨 수를 쓰든 용하다고 소문만 나면 돈 버는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고, 남들보다 복채를 비싸게 받아도 용하니까 더 받는다고 생각하지 아무도 복채를 가지고 시비를 걸지 않았다고 한다. 어떻게 하든 입소문만 나면 점집 앞에는 밤새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단다.

시간이 늦어 일어서려 하니 어차피 오는 사람도 없으니 좀 있다가 가라고 잡는다. 평생 남의 이야기만 들으며 주절거리고 살았는데 처음으로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으니 속이 후련하다며 내게 고맙다고 한다. 그럼 할머니가 내게 복채를 내놓아야지 않느냐 하니 웃으며 “그러네” 하고 맞장구를 친다.


왠지 알지 못하는 서글픔이 밀려왔다.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의 무게를 내려놓지 못한 탓일까. 어쩌면 점이 고달프고 배고픈 절망에 한 움큼의 희망을 쥐어준 버팀목이었을지 않을까. 시간과 세월에 무너져 가는 판잣집처럼 자신의 남은 인생을 주름살로 버티며 갈 곳 없는 오기로 흘러간 자리 끝자락을 붙들고 있는지 모르겠다.

2.

개구쟁이 시절에 영도다리에서 자갈치 가는 방향으로 방파제가 있었다. 통통선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뱃사람과 상인이 내뱉는 고함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생선을 배에서 내려 바닥에 쏟아놓으면 상인들이 몰려와 손수레에 가득 싣고 갔고, 한두 마리쯤은 예사로 흘렸다.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손수레 앞에서 어정거리기라도 하면 거친 상소리가 귓전을 날카롭게 후려쳤다. 제 값을 받으려면 싱싱할 때 퍼뜩 운반해야 하는데 한 눈을 팔며 앞에서 어정거리는 행인에 부딪혀 실랑이 하여 지체되는 만큼 손실을 입기 때문이었다. 행인도 생선 비늘이 일렁이는 바닷물이 옷에 튀기라도 하면 비린내가 스며들어 쉽게 지워지지 않기에 여간 낭패스럽지 않았다.


영도다리 아래에 또 하나의 방파제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어 늘 한적하였다. 다리 아래라 높이가 낮고 배를 댈 수 있는 시설이 없는 데다 자갈치 시장과 거리가 멀어 여러 가지로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이 한산한 방파제가 꼬맹이들의 놀이터였다. 다리 밑이라 늘 그늘지고 바람이 불어 시원하였다. 벌거벗고 있어도 따가운 햇볕에 살이 타는 걱정을 안 해도 되었다. 애들은 영도다리 교각에 옷을 벗어둔 체 방파제로 나간다. 앙상한 갈비뼈에 쏙 들어간 배를 손으로 감싸기도 하고 볼 것도 없는 앞을 양손으로 가리기도 하지만 아무도 엉덩이를 가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둥그런 엉덩이를 드러낸 채 모여서 물에 들어갈 순서를 정한다.

순번이 정해지면 물에 들어갈 아이는 제 허리에 새끼줄을 묶고 “잘 잡아라이” 하고 바닷물에 풍덩 뛰어 들어간다. 방파제에 선 아이는 새끼줄을 잡고 수영을 하고 있는 아이를 지켜본다. 아이가 헤엄을 치고 들어가는 만큼 새끼줄을 풀어주고 돌아올 때면 조금씩 당겨 수월하게 해주었다. 힘이 빠져 위험하다 싶으면 재빨리 새끼줄을 당겨 방파제로 끌어올린다. 이는 서로 지켜야 하는 엄격한 약속이었다.

아이들은 수영을 따로 배운 적이 없다. 얕은 개울에서 바닥을 짚고 물장구치며 퐁당 거리는 정도이고 물장구에서 익숙해지면 개헤엄을 친다. 개헤엄은 머리는 물 밖으로 내밀고 팔과 다리를 개처럼 구부려 접은 체 앞뒤로 휘젓고 나아간다. 개헤엄은 물을 치고 나가는 힘이 세지 않고 멀리서 보면 물 위에 머리만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개헤엄의 큰 장점은 헤엄을 치면서 따로 호흡조절을 할 필요가 없어 숨쉬기가 자유롭다. 조금 헤엄을 칠 줄 안다고 하는 아이는 평형인 개구리헤엄을 친다. 개구리헤엄을 칠 줄 알면 수영 선수로 인정을 받으면서 아이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순번을 돌아가며 물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면 숨이 차고 지쳐서 다들 혀를 내밀고 숨을 헉헉거린다. 이때쯤이면 아무 생각 없이 다들 방파제에 드러눕는다. 마치 그물에 널어 말리는 생선처럼 앞을 드러내고 벌러덩 누워 있는 모습은 무척이나 적나라하다.

나도 몇 차례 물에 들어갔다 나오니 힘이 빠져 헉헉거리며 물 가까이 서있는데 누군가 살살 다가와 확 밀어 버렸다. 어떻게 해 볼 도리 없이 고꾸라지면서 바다에 빠졌다. 물에서 방금 나왔기에 무척이나 지친 상태였고 몸에 새끼줄도 묶여 있지 않았다. 허우적거리며 다리 밑의 빠른 물살을 따라 떠내려갔다. 방파제에 누워 있던 아이들이 놀라 고함을 지르고 발을 구르며 손짓을 하였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도 할 수 있는 게 허우적거리는 것 말고는 달리 없었다. 애를 쓰면 쓸수록 입안으로 밀치고 들어오는 바닷물을 꼴깍꼴깍 삼켜야 했다.


죽을 때가 안 되었는지 아니면 염라대왕이 어여삐 보살펴 주셨는지 때마침 지나가는 행인이 바다에 뛰어들어 물살에 떠내려가는 나를 건져 주었다. 정신이 몽롱했다. 잠시 후 삼킨 물을 토해내고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누웠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죽었나.” “아이다 아직 살아 있다.” 소리가 아득하게 먼 곳에서 들려왔다. 조금 정신을 차린 후에 주변을 둘러보니 아이들이 축 늘어진 나를 둘러싸고 웅성거릴 뿐이었다. 먼바다로 떠내려가는 나를 구해준 행인은 벌써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인사도 못했는데, 일어서니 정신이 몽롱하고 온몸에 힘이 빠져 걸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바래다주었지만 처진 몸으로 어떻게 집에 갔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가 떠오를 때면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이 하늘이 준 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았는가를 반문해보면 아무리 열심히 살았어도 부족하였다.

영도다리는 수많은 이들의 애환이 서린 아픈 역사를 안고 있는 장소이고 나에게는 처음으로 죽음을 경험하게 한 일촉즉발의 순간이 서려 있은 벌거벗은 유년기의 놀이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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