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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Jan 05. 2021

감자가 말랑해질 때


무심코 바구니에 오래 담긴 감자를 보았다. 언듯 봐도 상태가 좋지 않아서 뒤적여 보았다. 역시 박스로 사는 게 아니었는데 아래로 갈수록 숨겨진 감자들이 어지간히 쪼그라 붙었다. 어떤 건 한쪽이 썩어가도록 묻혀 있었으니 냄새가 안 난 것이 이상할만했다.

제법 많았다. 식구가 없다 보니 식재료 소비도 퍽 줄었다. 박스로 선물이 들어올 땐 일찌감치 나눠먹는데 것도 아차 하는 순간 기회를 놓쳐버리기 일쑤다. 아이들 어릴 땐 오히려 자주 채워놓곤 했는데, 이토록 감자가 썩을 사이가 없었는데 "이젠 먹을 만큼만 해도 남는다." 바쁜 와중에 자주 쓰는 내 변명 내지 합리화의 사정은 알아도 모른 척 넘어가 주던 고마운 식구들을 본다.

얼른 싱크대에 감자를 붓고 껍질을 깎고 도려냈다. 분명 선명한 감자의 뽀얀 속내를 보였다. 감춰도 그 안에 담긴 진심 같이 닿았다. 어쩐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속내는 누구나 진심이었겠다 싶었다. 제법 양이 많아서 찜솥에 가득 쪘다. 말랑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조금씩 구수한 냄새가 피어났다. 누구나의 진심처럼, 순정처럼,

감자를 한꺼번에 처리하기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는 감자 치즈크로켓을 만들기로 했다. 뜨거운 감자를 으개고 양파 설탕 마요네즈 소금 후추를 넣고 골고루 섞었다. 손바닥만 하게 반죽을 하고 그 안에 치즈를 넣고 동그랗게 말아 달걀물과 빵가루를 묻히면 된다. 그리고 예열된 기름에 튀기면 되는데, 여기서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반죽 양에 비해 다소 작은 튀김냄비가 문제였다. 거의 완벽한 재현이었는데 오랜만이라 그런지 눈대중의 오차가 났다. 넉넉지 못한 기름에 튀겨내느라 그런지 바삭 그을린 갈색빛이 살짝 아쉽지만 오히려 아이처럼 맛있게 먹어주는 아이들, 긴 겨울 그동안 못한 요리 솜씨를 지어보려고. 속마음은 기술 없이도 사랑이니까. 제법 다채로운 이 합리화는 서로 살리는 살림이니까,

아무것도 없이 어떤 사랑이 되는 순간의 고마움을 쓰는 밤, 오랜만에 깨어 있는 밤, 서툴러도 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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