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곤하게 눈이 녹아들기를 기다렸을까, 움직이고 싶었다. 가만히 겨울을 만지고 싶었다. 마침오늘 쉬고 있던 옆지기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이 한파에 나가면 얼어 죽는다'는 말에 묘한 배신감이 느껴져 '그럼 나 혼자 다녀올게'라고 했더니 따라 나선다. 드러낸 내 의도가 들켜버렸다. 금방 또 묘한 배신감을 회복하고 돈독해졌다. 곧바로 들키길 원했고 들켜서 좋았다.
그런데 막상 나가니 정말 추웠다. 그럼에도 시린 공기가 아까워서 걸었는데 하늘은 또 얼마나 파란지, 도무지 겨울 한가운데는 맑음이었다. 눈이 내렸고 눈을 녹인 겨울이 나를 보았다. 나만 너를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내 앞에 놓인 겨울 정서는 무엇보다 간결한 문장 같았다. 담백한 언어는 목소리 없이 싱거웠으나 속내는 편했다. 눈 맛이 이럴까, 눈을 밝으면 소리가 났다. 쌓이지 못해 덮였다. 마치도 봄을 위한 배려 같았다. 깨우지 않고 우리를 깨우는 숨결들,
걷다가 문득 커피 생각이 났다. 아무도 보지 않았지만 누구나 볼 수 있던 내 옷차림은 정말 나라고 말할 수 있는 단서가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폭 쌓인 나를 알아보기란 쉽지 않았을 테니까, 어느 정도의 단장은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상관없었다. 무작정 커피가 그리웠으니까 커피 마시러 가자, 그랬다. 사실 커피를 마시는 일은 단정 지을 수 없는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무수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오늘처럼 별 일 없듯 평범한 삶의 일부가 모든 것을 포함하기도 한다. 우리가 어떻게 달리기 시작했는지 이름만 알고 있던 카페를 찾아갈 수 있었던 모든 선상의 의미기도 했다.
비록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오래 창 밖에 시선을 둘 수 없었지만 이거면 되었다. 아인슈페너와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고 나왔다. 낯선 동네 어떤 길을 서성이다가 햇살 내린 정원 벤치에 앉아 찬 겨울을 만나다가 어느새 오싹한 한기에 차 안으로 뛰어 들어가 히터를 켜고 커피 마시던 기억이 꼬리 칠 테니까, 차 창밖의 햇살이 성큼 우리를 눈부시게 했으니까, 다 가질 수 있었다. 오고 싶으면 또 오면 되고
부디 그땐 푹 파묻혀 있어도 좋을 날이면 좋겠다. 별스럽지 않게 별스러운 하루의 부분을 담으니 꽉 차오른다. 눈 녹듯 고마운 옆지기의 마음도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