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위층에서 고함소리가 들린다. 요즘 부쩍 잦은 소란은 불현듯 불안하게 만든다. 자발적 고립을 적절히 누리고 있는 나는 넉넉히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래서 그런지 낱낱이 다 들린다. 어떤 일로 그리 화가 났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는 몰라도 무척 화가 난 소리들, 쿵쾅대는 발걸음, 사물이 부딪히는 움직임들이 내 머리 위에서 왔다 갔다 한다. 잔 소리치는 이는 도무지 열이 나서 자주 주파수를 올리면 그 상대는 가끔씩 더 큰소리로 상황을 압도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달그락 달려드는 한 사람은 속이 상한다. 상한 소리는 길고 오래 저 홀로 하소연 처럼 이어진다. 공허함 뒤의 침묵을 깨는 소리가 조금은 다정하길 바랬는데, 곁의 아이들 울음소리는 가슴을 찌른다. 자주 밤도 낮도 없다. 저마다 삶에는 무슨 이유가 있겠지 싶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번 즘은 겪게 되는 일인 것 같다. 그 지루하고 알 수 없는 감정선 그건 아무도 모른다. 옳고 그름의 이치를 누가 결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한쪽으로 치우친 편견은 아마도 여자의 목소리가 넘치면 얼굴을 찌푸리게 된다는 일련의 현상을 우선 그려볼 지도 모를 일이다. 가끔 억누르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남자라는 사실은 이 사건과 무방하다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사실과 추측 사이 실로 많은 사연들이 모여 있을 텐데 우리의 시선은 도무지 여자의 목소리에 방점을 찍는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일에 성별분업이 병치될 수 있는 일인지, 안타깝게도 말하는 일에도 지켜야 할 암묵적인 약속이 성립되는 시대 이기도 하다. 아직까지 이어져 오는 남성과 여성의 위치성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자는 얘기는 아니고, 동의할 수 없는 어떤 이야기들이 서로 혼선을 빚어 각자의 방향으로 더 엇나가기 전에 서로 눈 맞추고 마주 앉아 보자는 말이다. 이에 앞서 본질을 흐려버리고 빠져나가 다시 본질로 지배해버리는 소모적인 대화의 산만함을 줄여보자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오직 모를 뿐이다. 귀 담아 살펴보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어찌하면 좋을지 들어보자. 아득히 우리는 살아갈수록 서툴다. 그래서 영원하다. 걸어가면서 걷는 걸 배우는 것처럼 그냥 그 순간 부딪히는 마음을 만나면 좋겠다. 회복이 필요한 순간은 그다지 특별한 조건이 없을 것 같다. 그냥 진실로 거기에 있어주면 되지 않을까, 소리를 낮추고 눈을 맞추고 서로의 마음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모르면 모르는 체로 알아가면 된다. 그 끝이 그 시작이니까.
어느새 이 글을 쓰는 사이 위층이 조용해졌다. 아이들도 조용해졌다. 설마 내 얘기를 듣고 있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는 내 마음이 천장을 뚫고 그들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앉아있는데 어느새 햇볕 눈부시던 창가에 회색 구름이 놀러 왔다. 오래 머물지 않을 것 같은 희미한 어둠이 물러나듯, 위에도 그 아래도 평화가 흐르는 오후가 유난히 헐겁다. 그래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