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tv를 보는데 어느 부분 이 비슷한 이야기 중이었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리고 나의 수학 점수를 더듬어 보았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기억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잘했다면 기억하고 싶어져 오래 눌러 담았을 거니까 기억하지 않아도 기억날 거니까, 애써 기억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누구나 좋아하는 과목이 있으면 누구나 싫어하는 과목이 있을 것 같다. 나는 수학을 싫어했다. 아니 지금도 어려운 수학 문제를 보면 어지럽다.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잘할 수 없었겠지. 돌아보면 좋아할 수 있는 경험이 삭제된 것 같다. 아주 어릴 때 산수는 곧잘 했다. 재미있기도 해서 자주 백 점을 맞기도 했는데 산수가 수학이 되면서 점점 숫자가 싫어졌다. 이유는 너무 복잡했고 풀이 과정에 기울인 정성에 비해 자주 정답을 피해 갔다. 그럴 때마다 왜 이게 정답이지? 풀이하는 과정은 나만 진지했고 점수는 낮아졌다. 과정보다 결과가 주는 상실감은 점점 더 복잡해지는 숫자와 멀어졌다. 이윽고 즐겁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해답을 좋아한다.
우리는 점수를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다. 성적이 안 좋아도 괜찮다. 성적이 중요하지만 않다. 어떤 성공과 실패 경험의 기준이 바뀌는 중이다. 과거의 방식이 현재의 방식을 품을 수 없다면 서로 합해야 한다. 정해진 어떤 방식, 박스 안은 기준으로 가득하다. 기준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가치는 바깥이 되었다. 그럴수록 가치라는 기준 또한 박스에 갇혔다. 박스 밖의 행복을 생각해 보자. 어떤 정해진 박스에 행복을 맞출 필요가 있을까. 그럼 우리는 행복할까? 박스 안에 견고히 쌓여 굳어진 것들은 버리자. 그리고 헐겁게 화합할 것들은 이어가자. 최소한 일반적 공식에서 나올 준비가 된 개별적 역사가 박스에 갇히지 않게 자주 열어보면 좋겠다.
결과와 상관없이 열심히 했다는 기억을 기억해 보자. 최선을 다했다는 기억, 노력했다는 기억들, 싱겁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떠오른다. 흔히 듣던 교과서적인 말이다. 나 역시 약간 식상했던 밑줄로 성공과 실패, 라는 이런 유의 교훈적 상징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다시 살아졌다. 다르게 보면 성공과 실패라는 일반화의 오류를 나는 모든 경험이라고 말하고 싶다. 열심히 했다는 기억은 자신을 북돋아준다. 왜냐하면 그 순간은 참이며 그 순간의 희열은 꼭 그것이 아니어도 이것이 될 수 있는 믿음으로 살아질 거니까. 과거의 성공 공식이 오늘과 같지 않다고 한다. 노력의 배신, 이라는 말이 오가는 이유도 과거에 있겠지만, 소환되는 기억은 자신에게 물을 뿐이다. 할 수 있을 만큼만 열심히 했지? 그럼 됐어! 열심히 했다는 기억, 그것만 기억해! 그렇게 시작하자.
새 학년 새 마음, 새롭게 맞이할 고교 비포 스쿨. 무엇보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질문해 보자. 뭐가 되고 싶은지 보다, 나는 어떤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