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점심 만남을 가지고 헤어졌다. 오래전부터 한번 보자고 했는데 어제 늦은 밤 연락이 왔다. 밥 먹자고, 이 말은 내가 참 좋아하는 말인데 어젠 조금 멈짓했다. 만나기도 전에 어떤 피로감이 약간 밀려왔다. 계속 미루기도 그래서 내가 밥 산다고 했다. 사실 그녀의 문제는 아닌데 왠지 만나면 기류가 낮다. 가라앉은 기류를 올리려면 내가 힘이 든다. 웃으면 참 예쁜 사람인데 잘 안 웃는다. 웃기지 못하는 내 진지함은 그대로 한계를 느낀다. 그냥 있으면 화난 것 같아 보이는 걸 그녀도 안다. 힘이 든 것도 안다.
그런 그녀가 내게 고민을 터놓고 얘기하고 조언을 구할 때가 많은데 난 그때마다 그녀를 위한 진심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엔 잘 듣지 않고 상황을 자기 쪽으로 합리화하며 정리한다. 객관적인 시선이 부족하지만 모르고 그러는 것 같진 않고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던 걸 안다. 그래서 힘이 빠지지만 만날 때마다 되풀이되어도 난 또 진심을 다하고 그렇게 때때로 텅 빈다. 그것뿐이다. 그냥 에너지 호환이 어려운 사이의 홀로 에너지로는 마냥 버겁기 때문이다. 되도록이면 그 마음을 털어내고 나갔다. 상대의 호의와 신뢰에 대한 어느 정도의 고마움과 예의랄까.
그녀를 처음 만난 날이 떠오른다. 여럿이 모인 그곳의 대화에 잘 끼지 못하고 다소 의기소침한 모습이 마음 쓰여서 몇 마디 말을 건네주었다. 좀처럼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던 그녀가 내게 연락처를 물어왔다. 언제 한번 만나고 싶다고. 그 인연이 벌써 3년을 훌쩍 넘어간다. 그동안 자주 만나진 않아도 그녀가 어려움을 호소하면 곧장 달려 나갔다. 다행히 내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힘들게 자신과의 거리를 좁혀가는 중이다. 왜 그런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공동체로부터 스스로 소외되었다고 자주 느낀다. 일종의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 상대가 자신의 뜻과 다른 말을 하면 그냥 반박한다. 그리고 강한 부정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외로워 보였다. 하긴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다만 그걸 들키지 않으려니 점점 더 외롭다. 나도 그렇고.
그런 그녀와 어느 파스타집에 들어와 앉아 오랜만에 서로의 안부를 묻는데 순간 창 밖으로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를 뿌렸다. 비가 조금 쏟아졌다 금방 비가 그치는 날은 왠지 마음도 어두워진다. 축축한 옷을 덜 말려 입고 온종일 눅눅한 느낌처럼 대략 난감하다. 맞은편에 앉은 그녀와 무관한 하늘의 날씨에 시간도 무겁게 눌러앉은 듯 서둘러할 말을 찾게 되는 그 무의미한 순간이 의미롭길 바라며 말을 이어갔으나 또 실패했다. 그것과 상관없이 그녀는 또 무심히 그간 쌓인 힘든 속내를 털어놓는다. 들어주다 보면 내 얘기는 전혀 못하고 오는 경우도 있다. 오늘도 그랬다.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다가도 그대로 전이되는 감정에 기운은 쓰러진다. 그나마 그녀가 조금씩 회복을 하면 내 쓰러진 기운도 힘이 오른다. 헤어지기까지는 그렇다.
아픈 그녀를 보내고 오늘도 돌아와 바닥인 내 에너지를 충전한다. 또 언제 불쑥 연락이 올 줄 모르니까. 그런 그녀를 미워할 수도 없음도 안다. 외면하기엔 그녀의 마음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어쩌면 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해도 자기중심적인 그 어떤 것으로부터 빠져나오려고 노력하는 그녀의 마음을 아니까. 그 안에 보이는 나도 전혀 예외는 아닌 걸 아니까. 그녀 스스로 갇힌 마음을 열고 조금씩 행복해지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다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녀에게는 힘이 되어 주고 싶다.
행복은 고통과 떨어져 생각할수록 없는 일이다. 문제가 없음이 아니고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가는 그 과정 위에 있는 것이다. 문제없음이 아니라 문제 있음으로 존재를 꺼내고 회복하고 해결해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녀가 환히 웃으며 또 연락할게요. 그랬다. 그 말처럼 그땐 조금 더 씩씩해질 그녀를 기대한다. 그녀를 떠올리며 그녀 덕분에 나도 어떤 불편한 마음을 만진다.
그녀처럼 나도 솔직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