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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May 28. 2020

물 흐르듯이 마주 앉자.

싱크대 배수구가 막혔다. 설거지를 하고 물로 휑궈내는데 물이 잘 안 빠진다. 뭔가 막혔다. 그러나 눈으로 보면 흥근하게 잠긴 배수구 입구만 보인다. s자로 꺾인 좁은 길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짐작할 뿐이다. 보이지 않고 가로막아 웅크리고 있는 뭔가의 정체를 의심한다. 그건 지난날 내가 한 일에 대해 그 사사롭고 익숙한 습관 속에 뭔가 걸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 불안한 암시는 나를 추궁하고 왜 음식찌꺼기를 그곳으로 흘러 보냈어?라고 문제 제기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어느 정도는 수긍하지만 애써 변명하듯 지난 시간들을 복귀하고 검열한다. 나의 부주의였다 하더라도 의문은 그 정도에도 길이 막혀 숨이 가쁜 배수구의 역할이 부실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오히려 맞선다.


결국 내 부주의를 인정하고 경비실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마트에 가서 트래펑이라도 사 와야 할 형편인데도 며칠 지켜보다가 며칠을 더 고생한 셈이다. 물론 잠자기 전 싱크대 배수구에 트래펑을 붓고 자고 난 아침에는 보란 듯이 뻥 뚫렸다. 넘치는 물도 시원하게 빠졌다.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니 설거지할 때도 물 빠지는 시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더러운 물에 내 손을 담그지 않아도 되니 깨끗하고 기분이 좋다. 조금 늦더라도 관계를 돌아보는 일은 어쩌면 처음으로 돌아가 새로 시작하기 좋은 때이기도 하다.


사람 사이 소통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누구나 쉽게 말을 하고 누구는 쉽게 상처를 받는다. 그 누구와 그 누구가 아무런 관계가 아니면 일어나지 않을 일인데 한편 어떤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애착관계가 형성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부모와 아이의 경우는 더더욱 견고하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언제나 쿨 하고 헐렁하다. 요즘 부모의 자리를 자주 돌아보게 된다. 부모의 역할, 사회가 부여한 위치성, 가부장제 언어라고 말하기 앞서 관계를 위한 소통 아이들과의 공감채널이 다면적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걸 감정노동이라고 하고 싶진 않다. 마음이니까.


싱크대에 서서 배운다. 그렇게 하나씩 느끼고 알아가는 과정이 행복이 아닐까 싶다. 다만 그것이 집착이 아니길 바라지만 점점 내 방식대로 사랑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로 인해 어떤 이유이던 누군가 지금 힘들다고 말하면 먼저 그 마음을 충분히 살피고 읽어주면 좋겠다. 서로 간에 온도 차이는 다소 있을 수 있겠지만 사실 의도와 달리 어떤 말의 행간이 서로 다르게 닿을 수 있어서 입장 차이는 상대적이다. 외면할 것이 아닌 무엇보다 편할수록 지켜야 할 서로 간의 배려와 존중이 우선 된다면 의외로 쉽게 풀릴지도 모른다.  쉽진 않겠지만 가만히 나부터 눈 맞춘다.


“한쪽의 수고로 한쪽이 안락을 누리지 않아야 좋은 관계다.”  은유.


소통이란 상대의 물음표가 느낌표가 되도록 자근자근 친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령 오해가 있었다 해도 서로 이야기로 풀어서 안될 건 없기 때문이다. 모호하게 끊어진 대화가 이어지면 오히려 편해질 것 같다. 어쩌면 다시 지난 이야기를 꺼내니 상대 입장에서는 불편하기도 하겠지만 그럴수록 드러내면 사실 별일 아니다. 그러나 소통이 부재하면 쓸데없이 별일이 되고 만다. 또한 별일이어도 소통이 원활하면 쓸데 있는 별일이 해결되기도 한다. 상대가 안심하고 터놓을 수 있도록 귀 기울이면 충분하다.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혹시라도 말에 걸리고 가로막혀 답답해도 같이 마주 앉아 방법을 찾다 보면 뻥 뚫린 웃음을 찾고 조금씩 마음이 가벼워질 것 같다. 그렇게 마음 놓고 대화도 다시 이어지겠지. 물 흐르듯이 물이 알려준 귀한 소리를 담는다. 덕분에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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