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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Jun 20. 2020

 드디어, 라는 말

노트북을 새로 장만했다. 헤아려보니 8년 만이다. 드디어라는 말이 실감 나는 부사로 작동하는 이 느낌은 반드시 기대에 충족할 어떤 조건이 이제 겨우 맞았다는 사실일 뿐인데 엄청난 만족이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아주 잠시 신세계의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면 차가운 바람이 확 스쳐 지나가서 얼얼한 민낯으로 서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는 듯 얼굴을 비비는 한 사람처럼.


오래된 내 노트북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겨우 문서작업과 강의용으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요사이 줌 미팅이며 이번 주 언텍트로 진행된 토론에서 나의 노트북의 과부하로 인한 곤란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소회의실로 이동 중인 체 돌고 있는 시계는 풀릴 줄 몰랐으며 그렇게 한동안 잠자코 만 있을 수 없는 현장에서의 불안감이란 대략 좀 잡을 수 없을 만큼 기기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다행히 위기마다 잘 넘어갔지만 내 심장은 두근두근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다만 그 사실은 나만 알고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해 두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니 노트북 열기가 두려웠고 다시는 긴장된 순간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최적화된 조건의 노트북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막내딸 노트북을 LG 그램으로 바꿔주었다. 나도 잠시 탐이 났지만 그것뿐이었다. 엄마는 그런 것 같다. 나는 덜 가져도 아이에게 더 좋은 걸 주면 행복한 마음이 드는 존재는 그대로 포기도 쉽다. 문득 가성비 좋은 노트북을 고르다가 얼마 전 지인이 추천해준 노트북을 살펴보기로 했다. 제법 인지도가 있는 제품인지 아는 사람은 알고 나처럼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것이었다. 심지어 노트북 사양을 비교해보니 이 가격으로 최신 사양의 노트북을 구입하기란 어림도 없는 가격이었다. 꼼꼼히 비교해준 전문가의 의견에 비추어보고 나니 선택은 틀림없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i5 최신 사양을 이 가격에 구입하다니, 이름값보다 더 이름 값하는 노트북이 내게 왔다. 드디어


어떻게 그 노트북을 가지고 일을 했을까. 싶을 정도로 빨랐다. 노트북이 내게 요구한 인내심이 빚어낸 시간들이 위대해 보이기도 했다. 오전에 문서를 정리하고 옮겼다. 시계가 묶일 틈이 없다. 빛처럼 순간을 이동한다. 당연한 일을 이렇게 좋아한다는 건 그만큼 오래 기다렸다는 것이다. 이름보다 속이 더 알차다. 평소보다 조금 더 정중하게 오래된 내 노트북을 잘 닦아 가방에 넣어두었다. 나와 함께한 시간들도 함께 고이 담아 쓰다듬어 주었다. 여태 잘 견뎌주고 잘 버텨주었다고. 충실한 너의 몫을 아낌없이 수행해준 덕분에 나도 잘 살아왔다고 고맙다고 말해주었더니 화답하듯 불이 꺼지고 가방 안에서  기꺼이 푹 쉬어간다. 이렇게 그동안의 내 삶도 쉬어간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오후 줌 미팅은 아주 빨랐다. 모든 창들이 빨리 열려서 절대 긴장하지 않고 불안은 저 멀리 가져갔다. 하루 만에 수없이 많은 하루를 건지고 남겼다. 빠르게 스치면서 나날이 나아지면서. 유난히 바빴던 일주일을 보내고 또한 이 밤 첫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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