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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Jun 14. 2020

다이어리가 들려주는 이야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나이를 먹었을까. 그사이 얼마나 많은 삶들이 생성되고 소멸되었던 걸까. 하얀 백지 같은 블랭크가 오면 도무지 기억나지 않은 것은 대개 그땐 좋았다. 라고 채운다. 삶이 흐르고 나이가 든다는 건 축복처럼 귀하다. 그땐 몰랐을 것들이 다가오면 다가오는 것들을 알아간다. 영원히 이 나이가 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순간들. 오롯이 지금이어야 만질 수 있는 조각들이 퍼즐을 맞춰간다. 보잘것없는 한 모퉁이어도 채우지 않으면 완성되지 않을 꿈처럼 어느 하나 쓸모없음은 없다는 걸 알아가는 일. 어쩌면 아이들은 알았을지도 모른다. 좀처럼 지치지 않고 꼭 제자리를 찾아 주던 고사리 같은 손길로 ‘니모를 찾아서’라는 이야기의 주인공 없는 바다 귀퉁이여도 꼭 닫아주었으니까. 닫아 줄 줄 알았으니까. 또다시 무너뜨려도 채워갈 수 있는 아이들은 이미 삶의 진리를 체득한 선지자 같다. 두 손 들어 기뻐하는 내 아이들의 얼굴이 듬뿍 빛처럼 환했다는 이야기를 스펀지처럼 빛을 먹은 추억이 들려준다.         


지난 기억이 온전치 않아도 회복될 힘이 여기 있다. 어떤 망각이 그렇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지워지면 살이 차오르듯 연하게 빛난다. 그 모두를 기억해낼 수는 없어도 기억하기 싫어서 밀어내도 희미해져 퇴색해버린 기억은 더듬다 사라져도 잡지 않는다. 그래서 숨 쉬고 산다. 그 많은 걸 품고 그토록 오래 버티다 보면 푹 꺼진 머리로는 하늘 한번 보지 못하고 쿵 땅으로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많이 담고 살아왔을까. 버리고 비우고 사는 삶이길 바랐는데 온통 무거워졌다. 최소한 지키고자 믿었던 내 정체성마저 정체모를 것들로 뒤섞여 버렸다. 나는 살아졌을까. 살아왔을까. 수많은 기억들 사이 가끔씩은 멍들지 않고 익어 뭉개져도 시간이 흐르면 투명한 빛으로 걸러진다. 빛없이 거름종이에 남겨진 불순물 보다 진한 액체는 삶의 땀방울처럼 짜서 진짜다. 그 안에 녹여진 숱한 나날들 사이 고민과 사유의 방식을 한탄하는 일체의 모든 우주에 잠기면서 기꺼이 발효된다. 쾌쾌한 화학작용 없이 순전히 해가 오고 바람이 와서 나무를 흔드는 떨림이 내게 오는 순간을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기특하게도 나이를 먹으면서 쓴다. 다만 정체되지 않으려고 무뎌지지 않으려고.


이제 겨우 나만의 방식으로 쓰기 시작했다. 수많은 새해에 시작된 어떤 가능성은 늘 새것처럼 세 마음 새 뜻으로 와 이미 한껏 준비를 마친 꿈을 쓰기만 하면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거슬러 올라가면 아득해지는 기억들 사이 상기된 얼굴로 다이어리를 고르는 한 어린 소녀가 있다. 분명 한 올도 빠지지 않게 꽁꽁 묶은 캔디 머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루 종일 뛰어다녀도 그대로였는데 나는 머리를 묶을 때마다 한쪽 눈이 올라가는 아침마다 아프다고 엄살을 부렸다. 그러면 조금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그래도 풀리지 않는 곱슬머리를 캔디처럼 양 갈래로 단단히 묶은 소녀. 새해를 앞둔 어느 겨울이었다. 그땐 지금처럼 팬시문구점도 흔치 않은 때라 커다란 재래시장 안 유난히 우뚝 솟은 어떤 멋진 건물이 있었다. 그래 봐야 이층 건물이었는데 내겐 아주 큰 그림자 같았다. 시장 한가운데 들어선 모습이 제법 고급스러웠지만 단지 홀로 빛났을 뿐이어서 대체로 나지막한 시장에서 돋보였다. 일층 입구를 들어와 왼쪽 모퉁이를 꺾어 돌아가면 눈부시게 비치는 섬광처럼 금방이라도 달려가 그것들을 모조리 다 내 꺼하고 싶은 욕심으로 설레었다. 아름다운 보석처럼 진열된 그곳은 내겐 보물창고 같았다. 가로로 빛나던 낮은 형광등 불빛 아래 반짝이던 것들이 나를 멋지게 만들어 주었고 투명한 유리 아래 비치는 것들이 모두 탐났다. 반짝이는 만년필이 유난히 빛나서 만지작거리면 마치 근사한 어른이 된 것 같기만 해서 나는 그때마다 춤을 추듯 그곳을 나왔고 춤을 추며 또 찾아갔다.      


누군가 떠난 그 자리는 항상 주인아저씨가 말없이 그것들을 헝겊으로 닦아 다시 놓아두면 더 빛나서 도무지 더 탐났다. 그런 날이 깊어지던 어느 날 만년필 대신 자물쇠가 달린 별빛 일기장을 골라 가슴에 안고는 얼마나 기뻤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마 나를 데리고 간 우리 엄마도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면 왠지 모를 오랜 비밀 하나 들키지 않은 것 같아 다시 꺼내본다. 생각해보면 그때 우리 엄마는 아무래도 신여성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 맏며느리인 엄마는 공무원의 박봉으로 집안 대소사를 맡아해 나가려면 적잖이 힘들었을 텐데도 그 흔한 불평 한번 없었다니. 때때로 찾아와 사는 게 힘들다고 엄살을 부리는 시동생들에게 돈을 건네며 학비를 보태며 이건 그냥 주는 것이니 갚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던 울 엄마.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하면 첨에는 나중에 가자 하셔도 그다음 날이면 손잡고 같이 가자고 했다. 빠듯한 살림에 삼 형제 키우기도 벅찼을 텐데. 어디서 그런 긍정을 샘솟게 했을까. 심지어 낭만적이기도 했다. 마당과 옥상의 회초들이 날마다 엄마 손길과 눈길로 반짝였다. 그리고 늘 음악이 흘렀다. 빠듯한 살림에 삼 형제 키우기도 벅찼을 텐데. 어디서 그런 긍정을 샘솟게 했을까. 심지어 낭만적이기도 했다. 존경스럽다. 그렇게 넓은 가슴을 품은 엄마를 나는 닮아갔고 그해 겨울 나의 멋지고 고급스러운 다이어리를 품에 안고 쓰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어려서 공책 일기장이었다면 왠지 어른이 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게 맞을 것 같지만.               


그토록 간직하고 싶었던 다이어리를 빈칸 없이 써본 적이 있었을까. 더듬어 봐도 완벽한 채움은 없었던 것 같다. 빈칸에 점 하나 찍지 못한 설렘이 있었다는 사실만이 반듯하게 시작될 새해를 계획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결심은 사뭇 비장하기도 했다. 새롭게 필기도구로 바꿔 쓰기도 했다. 먼저 예뻐야 했다. 사각거리던 연필 소리가 좋아 연필을 깎아 꽂아두고 보면 흐뭇했다. 지금도 그렇다. 쓰는데 열중해야 하는 데 나는 그 모든 과정이 즐거웠다. 책상 주변을 정돈하고 꾸민다. 그러고 앉으면 왠지 삶이 정돈되는 느낌이랄까. 삶 역시 살아가고 걸어가는 그곳에 있는 것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특별해지는 행복을 느끼면 좋겠다. 그것이 하루를 잘살고 또 하루를 맞이하는 나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하루씩 자산이 쌓여간다. 그 모든 실패를 포함한.                       


올해도 다이어리를 쓴다. 이번에 좀 더 구체적으로 활용하고 싶어서 속지도 넉넉히 구입했다. 어떻게 하면 단정한 글씨로 알차게 적을까 고민하다가 여러 장을 떼어내기도 했다. 첨엔 뭔가 잘하고 싶다. 글씨가 삐뚤면 다시 쓰고 오색 형광펜으로 나만의 방식으로 영역을 표시하고 마킹을 하고 중요한 건 박스를 그리고 별표를 친다. 이렇게 쓰면 된다. 그리고 고치면 된다.  단단한 근육이 생기기 전에는 완벽한 루틴을 이루기 어려웠다는 걸 그때도 알았지만. 지나 보니 게을렀다. 돌아서면 며칠이 훅 지나버린 숫자를 되돌리기엔 물리적으로 감소한 기억력을 더듬기 바빴다. 좀 더 잘 쓰고 싶다는 힘이 어디서부터 왔을까. 기특하게도 처음 그 마음처럼 다이어리를 고르고 필기도구를 고르는 손길에 담긴 떨림 같은 그 순간의 정성과 갸륵한 마음이 그대로 내게 오면 드물게 때때로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삶도 그렇게 고쳐간다. 어떤 삶이 표준이어야 한다는 기준점은 내가 만들면 되지 않을까. 하루하루씩 써 가는 다이어리는 내가 살아낸 하루만큼 담긴다. 온전치 못할 하루였다면 내일은 내일만큼만 쓰면 된다. 내 삶이 담겨서 나를 꺼내보고 나를 다듬어 가는 나를 기억해 낼 수 있게 쓰면 된다.  쓰면서 좀 더 잘 살고 싶은 것이다.  걸어가면 된다. 서툴러도 걸어가는 삶이 글이 되는 순간을 담는 일이니까. 드물게 올해는 멈춘 봄의 일정을 담지 못한 다이어리의 여백이 오히려 헐거워 비어 있을 수 있었다. 이처럼 삶은 다 채우지 않아도 되는 게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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