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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Jun 06. 2020

저녁 곁에 앉았다

뜻밖의 오랜 은둔은 자발적인 가사노동의 즐거움을 갖게 해 주었다. 여유로운 시간은 평소 바빠서 소홀했던 부분을 찾아주기도 한다. 몇 가지 저녁 반찬을 해두고 앉았는데 꽃 곁이었다. 문득 아무 일 없이 피고 지는 인심 좋은 아이들처럼 보라색은 미소 같았다. 밥 냄새가 난다. 밥 냄새는 그냥 좋다. 밥 냄새라는 말은 알 수 없는 태초의 그리움 같다. 냄새만 맡아도 허기진 영혼에 살이 차오르는 온기는 삶을 오래도록 이어준다. 요즘 내가 만든 음식이 맛있다고 자주 칭찬해준다. 다소 놀라는 반응이 은근히 좋다. 나도 잘하는 줄 몰랐으니까. 누구나 하면 다 잘한다

엄마가 해 준 밥을 먹고 나는 자랐고 내가 해준 밥을 먹고 아이들이 자란다는 사실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쌀 한 톨이 삶을 이루는 씨앗으로 심겼다. 흙이 먹은 물을 먹고 바람이 오고 해가 오고  온 우주가 돌봐준 생명들이 나를 이룬다는 사실은 보이지 않게 시작된 여행처럼 여기온 나를 존재하는 순간들로 기억된다. 그래서 나는 자주 쓰러져도 자주 설렌다.




온종일 창을 열어놓고 살았다. 바람이 들어오는 길을 열고 바람을 느꼈다. 곧 소나기가 쏟아질 듯 하늘에 그늘이 지고 바람이 소리 나게 흔들면 나는 소리 없이 흔들렸다. 갇힌 하늘이 납작하게 엎드려도 바람은 왠지 저절로 헐렁하고 헐겁고. 심지어 움트는 새벽빛 같은 하늘은 결마다 푸르고 투명하게 빛났다. 심상치 않은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창을 흔들고 사라졌다. 먼 하늘을 돌아서 여기온 바람이 오고 가는 사이 이 바람이 그 바람이 아니어도 바람은 때때로 닮아서 보이지 않아도 저 멀리 바람이 분다. 소나기가 쏟아지면 좋겠다. 유월의 신록이 바람에 날리는 오늘은 여름이 조금 더 짙어졌다. 나무들도 꿈을 꾸는 지금. 그들도 나처럼 여행 중이겠지. 어두워도 잠들지 않는 바람을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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