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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Jun 22. 2020

먹고 마시는 일


어제는 너무 많이 먹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도 넘치고 오랜만에 만난 맛있는 것들의 유혹도 넘쳤다. 우리 뭐 먹을까를 종일 열 번을 넘게 말하고 나니 현기증이 났다. 사실 맛있는 음식들을 도무지 피할 길이 없었다. 심지어 다가갔다. 갈수록 어떤 허기를 채운 포만감은 여러 가지의 것들이 쌓이면서 오히려 이산화탄소 가득한 풍선처럼 부풀었다. 점심으로 먹은 태국 음식 중 해물 쌀국수는 맵고 깔끔한 육수로 감칠맛이 났는데 생각보다 양이 적은 쌀국수 한 그릇을 둘이 나눠먹기엔 턱없이 나눠먹고도 배가 고팠다. 같이 주문한 파인애플 치킨 볶음밥이었나. 메뉴 이름은 왠지 상큼했는데 막상 카레가 들어간 밥은 보기보다 전혀 흥미롭지 않았다. 여전히 부실한 점심이 아쉬워 먹다 보니 결국 넘쳤다. 그 길로 맛있던 입맛도 사라졌다. 또한 먹을수록 먹은 것 같지도 않아서 속은 열심히 어떤 특별한 뭔가를 요구했다. 괜히 먹었다는 후회로부터 다른 음식에 대한 기대는 기대일 뿐 속을 달래줄 어떤 기발한 이름을 호명하기도 어렵게 해서 단지 막연했다. 그러다 문득 누구나 먹고 마시는 일이 사는 일 같다는 생각에 어떤 피로감마저 기껍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숙연했다. 솔직히 거의 모든 삶들이 이렇게 흙에서 시작되기도 했던 것 같다.


우리가 찾아간 카페의 커피는 오로지 뜨거운 아메리카노이어야만 했다. 최소한 조금 전에 먹은 음식물을 잘게  부수는 에너지원이 아닐까는 근거 없는 상식으로 우리의 넘치는 포만감이 무너지기 바랐고 우리는 커피를 마시면서 조금씩 그것들을 녹여간다고 믿었다. 전혀 사실무근은 아니어서 칼로리를 소모시켜준다는 우호적인 말들을 강조하며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위안 삼기로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속을 달래며 뭐든 지나치면 안 된다는 평범한 말을 떠올렸다. 아깝다고 다 먹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과감히 단절하지 못하는 내 소심함을 잘라내어야만 했다. 나는 늘 음식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음식에 대한 모독일까 봐 조심스러웠다. 차려진 밥상을 거절하기엔 밥을 지은 이들의 노고에 대한 예의가 실종될 것만 같아 그만 태초의 상실감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밥이 마음처럼 거절당하게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기본적인 경험이 공평하게 나를 이해해 줄 것이라는 생각에 반복되는 음식 예찬은 이어졌다. 멈출 때와 달릴 때를 기억해야 한다는 이 오래된 해법을 안다고 했는데 보란 듯이 또 무너졌다. 그래서 녹여내고 달래려고 했다. 그렇게 노력은 방법이 되면서 나아진다. 다만 함께 원했던 시간은 문제적이지 않아서 지나치게 넘치지 않았고 뜸을 잘 들이고 잘 지어갔다고 고백한다. 서로 오래 달래며 익어갔음으로


암튼 우리가 도착한 백화점은 휴일이어서 그런지 조금 사람이 붐비는 듯 층마다 쇼핑하는 이들이 무리 지어 거닐고 있었다. 이제는 마스크를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익숙해진 풍경으로 자리하고 저마다 마스크의 다양성도 나날이 다채로워졌다. 마스크 패션을 고민해야 할 때를 상상이나 했을까. 뜻밖의 일이 벌어지고 있는 이곳의 도시는 생각보다 차분하다. 보편적인 일상의 얼굴로 만나고 있는 우리는 언제 즘 다시 얼굴을 전부 드러내고 웃을 수 있을까. 먹을 때마다 마스크를 턱으로 내리고 또 가리고 이것이 성가시거나 불편하기보다는 기꺼이 동참하는 이들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 자체로 삶이 되어가는 부분들이 연결되고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한다. 더군다나 서로의 동일시 없이는 어떤 사회의 실천의지는 나약해지기 마련인데 타인과 함께 하는 시간이 지루하기도 하겠지만 거기서 우리는 삶을 지어간다. 서로를 구속하지 않으면서 이루어지는 사랑은 몹시도 어려워 한쪽으로 기울기 십상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조금씩 인간 삶의 일부로 이해하는 시대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달리다가 멈출 수 있는 놀라운 멈춤은 목표가 아닌 더불어 살아가는 가치이기도 하다.


친한 언니의 딸이 9월이 오면 결혼을 한다. 그래서 언니가 나를 백화점으로 불러냈다.  담주 주말 예정된 양가 상견례 시 입을 옷을 골라달라고 했다. 그 이유를 명제로 오랜만에 수다를 떨었다. 나는 언니에게 어울리는 옷을 고르고 언니는 흔쾌히 입어보고 결정했다. 원피스의 느낌이 단아한 언니를 닮았다. 마치 원래부터 언니 옷이었던 것처럼 근사하게 어울렸다. 어렵지 않게 서로 존중받는 느낌이 좋았다. 모든 시간이 다정하게 흘렀다. 다만 그 후로 먹게 된 음식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앞에 먹은 음식들로 인한 거북함을 지우려고 또 먹고 또 마시다 보니 소화되지 않은 체증 같은 것이 밀려와 밤이 되어도 아직 자면 안 된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어떤 신호를 알아차리는 일은 관계를 여는 일 같다. 사람이던 사물이던 그것이 음식이던 함부로 할 수 있는 건 어디에도 없다는 단순한 사실이 모호해지기는 커녕 아무 설명 없이도 알아간다. 침묵은 다양한 시선들 사이 어디선가 알고 지은 죄보다 모르고 지은 죄가 더 크다는 말씀으로 들렸다. 파인애플 향기로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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