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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Jul 15. 2020

비 오는 줄도 모르고

비가 오는 줄도 모르고 벌떡 일어나 재활용 쓰레기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뜻밖에 나는 비를 맞았고  불과 30미터도 안되는 짧은 거리를 달려야 했음에도 차분히 내리는 비의 촉감을 맞기로 했다. 다시 들어가 우산을 가져오기도 귀찮고 무엇보다 이런 빗나간 우연은 잘 오지 않을 것만 같아서 놓치기 싫었을 것이다. 1층 입구에 서서 비를 보았다. 가로등 아래 뿌려지는 비의 투명함이 그대로 드러나 그 아래 서 있는 누군가 사랑하는 순간 같았다. 스프레이 같았다. 살갗에 닿는 느낌이 차갑다기보다는 보드라운 바람의 손길 같았다. 비 묻은 바람인지 바람 묻은 비인지 저 하늘에서 만난 비와 바람은 서로 섞여서 더 근사했다.


그렇게 조금 서 있었는데 등 뒤로 사람들이 왔다. 그러고보니 내 모습이 대략 난감했다. 그렇게 오래 머물줄 알았으면 조금 챙겨 입고 나올걸, 질근 묶은 머리에 잠옷은 아니지만 누가보면 잠옷이라고 할지도 모르는 옷차임에 슬리퍼는 발가락이 다 드러났다. 의식없이 의식하고 나면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 빗 속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나를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말이다. 잠시 걷다가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진 걸 느꼈을 땐 나도 모르게 웃었다. 아무리 저녁 낭만이 좋아도 당장 내 몸이 젖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자신이 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내가 비를 보았고 비를 맞았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꺼내볼 수 있는 저녁낭만이기 때문이다. 바람만 만져도 좋았을 텐데 비까지 와 주었으니 더할 나위 없는 저녁은 선물 같았다.


이건 순전히 바람 때문이었다. 집 안에서 보면 바깥은 바람의 색을 닮아 푸르스름하게 빛났는데 마치 바람도 좋은 이런 저녁에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오늘 생각해보니 집 밖을 나간 적이 없는 것 같아 하루가 닫히기 전에 가만히 않아서 갇히기는 싫었던 모양이다. 며칠 바쁘게 움직이면 그 사이 하루는 쉬어준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종일 하릴없이 무심하다보면 보이지 않는 어떤 상냥함이 감싸와 숨이 차 오를 때가 있다. 그건 미처 느껴보지 못한 숨결 같은 거여서 간혹 어디 숨어서 이렇게 다정히 데워졌나 짚어보기도 하다가 온 집안의 물건들의 온도를 잰다.  화초의 자리를 옮겨주기도 하고 소파 테이블 위에 작은 토분 하나 올려두기도 하고 쿠션이랑 베개커버를 벗겨서 깨끗이 빨아 널기도 하는데 이렇게 솔솔 빨래 냄새가 나면 사람 사는 집 같다. 그러다 빨래가 마르기도 전에 저녁이 되었고 그러다 바람이 불어서 나갔다가 비를 만나게 되었다고 쓴다.


다만 바삭하게 해를 먹고 말라야 하는데, 조금 무거울 따름이어서 내일의 바삭한 해를 기다려보는 밤이다. 바람따라 나갔다 들어와 앉으니 제법 비가 소리를 내며 내린다. 자분자분.이라고도.



참, 팬텀싱어3. 할 시간이다. 라고 말했던 어느 날 밤에 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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