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_위화

by 하루



'인생'이라는 책 한 권을 읽고, 나는 이 책과 시대적 흐름이 닮아있는 영화 '5일의 마중'과 루쉰의 '광인일기'를 더듬어 보고 싶어 졌다. 또한 그 시대 여성의 위치성과 그들의 삶 가운데에 서성이기도 했다. 잘 될지 모르겠지만 두서없이 써 보기로 한다.


먼저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문화 대혁명에 대해서 알아본다면, 문화 대혁명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중국에서 벌어졌던 사회적, 정치적 격동으로 공식 명칭은 무산계급 문화 대혁명이다. 문화혁명이 일어난 배경으로는 중국을 공산당 화한 모택동 지도부는 대약진 운동으로 중국 경제를 실리려고 하지만, 경험 부족으로 실패한다. 모택동은 권력에서 물러나고, 류샤오치와 등소평이 등장하여, 수정 노선으로 경제정책을 실시한다. 즉 자본주의의 일부를 받아들인다. 모택동이 수정주의를 빌미로, 류샤오치와 등소평을 공격하기 위해, 린바오와 사인방을 조정하고, 학생들을 선동하여 문화혁명을 일으키고, 권력을 다시 장악한다.



1966년 5월 16일 모택동은 부르주아 계급의 자본주의와 봉건주의 관료주의 요소가 공산당과 중국 사회 곳곳을 지배하고 있으니 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문화혁명이 시작된다. 북경대학,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이 위주가 되어, 홍위병이라는 혁명조직이 만들어지고, 기존의 교수 지식인 자산가 과거 공산혁명의 동지, 중국의 과거 문화마저도 파괴된다. 10년간의 문화혁명은 모택동의 사망으로 끝이 나고, 중국 공산당은 문화혁명은 실패라고 말한다. 이 운동의 결과 중국을 이끌 수 있는 많은 지식인들이 사라지고, 혁명 이후 상당기간 후유증을 앓는다. 그리고 등소평이 다시 정권에 복귀하여, 수정 공산주의로 중국 경제를 살린다.



5일의 마중. 매일 그녀가 기다리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문화 대혁명은 부분적인 사실로부터 회고의 순간, 연결된 현실의 문제를 바로잡고 또 다른 실천적 전환을 꿈꾸는 순간 잃어버린 10년의 시간을 찾아가는 것이다. '광인일기' 역시 우리 사회 속에서 광인은 누구인지, 우리 사회의 통념이 옳은 것인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우리 자신이 광인은 아닌지 나의 노예에게 질문하게 한다. 언제나 유동적인 후기 근대 우리의 삶 속에 무엇이라고만 할 것이 없다. 그 무엇도 어떤 규범화할 수 없는 당위성의 결말은 결말이 아니듯.



덧붙혀, 중국은 현재 시진핑이 일당독재를 선언하면서 다시 예전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 시선도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특히 시진핑의 정치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중국인들이 앞으로 어떤 생각으로 정치를 바라볼지가 궁금해진다. ‘중국은 다른 나라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겠다 ’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지점이다.



이어서 여성의 삶을 생각한다.



문화 대혁명 시기 여성 노동력의 완전고용을 이룰 만큼 공업이 방달하지 못하였으나, 중국 정부는 전 도시에서 여성을 포함한 전 사회 노동세력의 완전고용정책을 채택했다. 이 과정에서 고용을 창출하기 위해 발전된 것이 근린 조직이다. 40대 중반 이상 70대까지 중. 노년층으로 구성되었고 지역생활을 관리했다.


모택동 시기 여성의 고용이 늘어났다고 하여도 성별 평등이 성취된 것은 아니다. 성별 직종 분리를 예를 든다면 청소, 식당, 보육원, 기계유지 등 서비스 업무 및 보조업무는 교육 수준에 상관없이 여성들이 맡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임금상 차별이 있다 해도 임금이 아주 낮았기 때문에 여성들이 성차별적인 일에 종사하면서도 임금에서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직업은 평등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국민당과 공산당과의 대립구도 현실 안에서 초기 방향의 특징은 국민의 정치적 상황과 연동되면서 전개되어갔다. 여성의 자유 평등이었던 담론이 바뀌는 지점에서 공산당이 매뉴얼대로 반응했다. 삶의 괴적이 다르다. 규범이 뒤집어지는 사건 여성도 시민이다, 시민으로서의 권리인 참정권을 내세운 국민당과 부분적인 노동자 농민 중심의 공산당의 여성운동의 대응방식이 달랐다. 중국 국민당의 민족주의 운동은 자본가, 지주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방향의 국가건설 노선을 걷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 공산당의 민족주의 운동은 노동자,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방향이라면 자본가, 지주계급의 착취로부터 노동자, 농민의 해방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국민당과 사실 섞이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 같다. 그러나 당장 일본이 중국 본토를 침략하고 있는 판국에 서로 싸워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서로 연합하여 국공합작하게 된다. 서로 건설하고자 하는 국가관은 틀리지만 투쟁의 방법과 그 대상은 서로 일치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의 민족주의 운동에 주체는 노동자, 농민이었고, 중국 국민당은 그 주체가 자본가, 지주계급이었다는 것이 가장 핵심이라고 본다면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중심에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인생,




이 책은 지루할 틈 없이 생각보다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다소 장황하게 그려진 중국적인 서사가 답답하게 전개될 거라는 우려와는 달리 '푸구이'의 삶이 책 속에서도 빠르게 흘렸다. 예측 가능한 사실로부터 예측 불가능한 삶에 대한 태도는 지극히 보편적인 삶에 대한 긍정으로 읽는다. 다만 그것이 정체된 삶을 안겨줄 거라는 부정적 기대보다는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는 장치로서 비교적 담담하게 그려낸다. '푸구이'의 삶 어디에도 요행은 없었지만, 살아가면서 알게 되는 삶 속에서 결코 안주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삶을 통해 삶을 알아간다.


어떤 순간에 어떤 선택은 자주 갈등하게 만들지만 단연코 삶을 지탱해주는 기족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그 모든 것을 감내하는 것도 사랑이었다. 일방적인 사랑을 요구하고나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그대로 사랑이었다. 전통사회 가부장제의 모순과 성별 고정관념에 따른 여성의 삶을 짚는 일은 여기서는 하고 싶지 않다. 무비판적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의 삶과 견주어 본다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어떤 지점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이 책에서 오로지 삶 속에 놓인 주인공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싶기에 그렇다. 기본적인 중국적인 정서에 비춰 본다면 과히 어긋 난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읽어주는 시간도 가끔씩은 필요하다. 조용히 책을 덮으며 그러고 싶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일단 한숨 쉬어야 뭘 먹을 수 있거든."



다만, 여전히 진행 중인 고단함에 밀려 부유하는 삶들이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때론 쉼을 주기도 한다면, 우리는 그동안 너무 고단했다. 좀 밀쳐두면 어떨까. 사람 사는 일이 거기서 거기다.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씩 알아간다. 남아있는 자들이 살아가는 세상과 살아간 사람들의 세상 그 사이에 존재할 것만 같은 나날들을 위한 견딤. 누구의 삶도 펌하되지 않아야 한다. 또한 누구의 삶도 재단되지 않아야 한다. 각자의 삶에 대한 변명마저 못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숨 돌리자.



때론 고통으로 말미암아 아주 작은 소소함으로 깃든 행복을 행복으로 껴안게 되는 현실마저도 얼마나 초라하지 않게 아플지, 사람은 가까이 두려움이 덮칠 때도 나에게 가장 힘이 되어주는 진실은 나였다고 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사람의 감정이 진실이 되는 순간 밝아오는 대지의 단단함을 만지게 되지 않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연해지는 기록들을 마주할 때 인생은 살아가는 자의 몫으로 남는 일, 이 따위의 감동에도 삶을 통틀어 가장 소중하고 귀한 시간이었다고 남기지 않았을까.


노인이 된 '푸구이' 에게 소는 자신 같다. 그래서 둘 다 '푸구이' 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를 긍정하는 초연함, 지나가고 스쳐간 사람들의 흔적을 더듬는 순간에도 흙 위에 앉았다. 그리고 호명한다. 소환되는 모든 순간을 열고 마주한다. 기억은 미화되는 것일까. 받아들이는 것일까. 수용의 미. 이상하리만치 평온함은 그동안 부딪힌 흔적들이 낸 생채기를 본다. 무엇보다 삶을 긍정하는 순간 세상도 우호적인 손길로 다독이는 것처럼. 그리고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것이 실소를 금할 수 없는 허망함으로 소진될 지라도. 그 어떤 정치적 배경을 비롯한 이념의 맥락은 그냥 아는 지식이 되고 사람의 본성 그 어디에 숨어있던 삶, 그 자체의 위대함이 진실로 존중받길 바란다. 비록 그 고단함의 무게를 견디는 자의 힘겨움은 떼어낼 수 없더라도 개별적 삶의 가치는 읽을 수 있었다.



산다는 건 소소한 기쁨의 나락으로 떨어지길 원하고 자주 설레기도 하지만, 가끔 힘들 때는 괜찮아. 하고 어떨 땐 하나도 안 괜찮아.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한다. 보편적인 삶이 우리를 정체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우리의 숨은 행복을 조금은 찾아주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다시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치우친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능동적인 삶이기도 한 것처럼. 그래서 지극히 펑범한 삶의 긍정적인 면을 보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 빈둥거리며 놀고,

중년에는 숨어 살려고만 하더니,

노년에는 중이 되었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삶이 어떤 가치가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걸까?

살아가는 동안 살아가는 것을 생각하는 우리의 굴레는 무엇으로 덧없음이 아닐까?



삶과 죽음 사이 놓인 사람들의 관계는 우연처럼 인연처럼 만난다. 천부적 지위를 가진 자도, 가진 것을 빼앗긴 자들도, 가진 것을 빼앗은 자들도 뒤 섞인다. 아낌없이 얻고 아낌없이 빼앗긴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선택이 실패를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은 진행 중이다. 어두운 밤이 내려와도 단단한 삶의 속살을 드러내며, 부른다. '부름의 자세'로부터.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한 권의 책을 더 읽었다. 읽을 책들이 쌓여서 좋다. 유난히 집중해서 읽고 쓰고 싶은 마음인데 사실 쉽지가 않다. 그래서 이 책도 단숨에 읽고 단숨에 쓴다. 사실 바쁜 일정이 겹치면 숙제처럼 밀리기도 하지만, 이렇게 숙제로 주어지면 조금 더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고맙고 또한 다음 함께 읽을 책을 기다린다. 이런 사소한 일들이 하루를 살게 한다면 나는 이 평범함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