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 1등에 가린 불편한 진실
열일곱 살 겨울,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온 고등학교 입학 성적을 한참을 멍하니 쳐다봤다. 고등학교 반편성 고사에서 400명 중 55등을 했다.
중학교에서는 항상 1등을 했던 나에게 이 성적은 큰 충격이었다. 처음으로 내가 최상위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결과였다. 항상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기대와 압박 속에서, 이 성적은 나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
사실 중학교 다니는 동안 운이 좋았다. 전교 300명 중에서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고, 그게 내 실력이라고 믿었다. 평소보다 성적이 안 나오면 노력을 덜 한 거라고 '자기 위로'를 일삼았다. 당시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줄여주었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시내에서도 학업 성취도가 높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경쟁자가 별로 없어서 투자한 시간에 비해 높은 성적을 받기 일쑤였다. 다른 학교는 기말고사 평균 99점을 맞아야 가까스로 1등을 할 수 있는데 반해, 우리 학교에서는 평균 96점으로도 전교 1등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중학교라는 작은 연못에서는 큰 물고기였는데 고등학교에 첫 발을 내딛은 순간, 나는 더 큰 호수에 던져진 작은 물고기가 된 듯했다. 새로운 물에서 더 많은 경쟁자들과 마주하며 내가 더 이상 큰 물고기가 아님을 깨달았다.
공부한 대로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는 중학생 때의 자신감은 서서히 퇴색되어 갔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습 동기를 잃었고, 공부에 대한 열정도 식어 갔다. 무엇보다 성적이 하락하면서 습관이 불규칙해지고, 점점 더 무기력해져갔다.
물론 내가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빨리 깨달았으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 터. 학창 시절에 겪은 성적에 대한 환상은 대학교까지 이어졌다. 대학교 2학년 1학기 때 20명이 채 안 되는 같은 학과 학년에서 1등을 받은 것이다. 당시 동기들이 군대 다녀오고 복학하고 한창 놀 때 나는 공부를 택했다. 1등을 해서 학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학창시절의 역사는 반복되었다. 2학년 1학기를 중학교 시절에 비유하자면, 2학기는 고등학교라 볼 수 있겠다. 2학기에 복학한 학과 동기들이 잘 하는 친구들이다 보니, 이들에게 공부로 비빌 엄두가 안 났다. 떨어진 성적을 보고 그간 받은 좋은 성적은 운이구나 싶었다.
15년 넘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진짜로 공부를 잘했던 시절이 있었나 싶다. 직장을 자주 옮기고 인간관계를 쉽사리 맺지 못하는 현재의 나를 보면서, 과연 나는 '열심히'가 아닌 '제대로' 공부하는 법을 알고 있었는지, 진짜 '똑똑한' 사람이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전교 1등'이라는 타이틀은 시야를 가리다 못해,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배우고 성장해야 하는지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깊이 있는 공부 대신 효율적인 암기를, 진정한 이해 대신 빠른 성과를 쫓았다. 예를 들어, 새로운 분야나 심화된 개념을 탐구하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에만 집중하였고,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구조화하기보다는 개별적으로 암기하는 데 집중했던 것이다.
공부를 진짜 잘하는 학생은 '지능'이 뛰어나다. 시험에만 매몰된 교과서 위주의 지엽적인 공부는 문해력, 문제 해결력 등 진정한 '공부 머리', 나아가 '일 머리'가 될 수도 있는 근본적인 '학습 지능' 자체를 계발할 기회를 앗아간 것이었다.
내가 그동안 쫓아온 '전교 1등'이라는 타이틀은 결국 제한된 환경 속의 작은 성취에 불과했다. 진정한 공부는 순위나 점수로 측정할 수 없는, 더 깊고 넓은 지혜의 바다를 헤엄치는 행위와 같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기 시작했다.
성적표에 기록되지 않는 진짜 공부를 하려고 한다. 그저 작은 연못에서 헤엄치던 '커 보이던' 물고기에서, 넓은 바다에서 헤엄치는 자유로운 고래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