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그 아버지 마이 닮았네

by 시누의 서재

고등학교 1학년,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들었던 말이에요.


제가 살던 곳은 모두 합쳐도 10가구가 채 안 되는 시골 마을이었어요. 아버지께서도 나고 자라신 곳이었고 덕분에 동네 어르신들은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알고 계셨죠.


평소에는 못 뵙던, 다른 마을 어르신들까지 모여서 정신이 없는데 어르신 몇 분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어요.


'자가 누구라?'(쟤가 누구야?)

'자가 XX이 아들이라~'(쟤가 XX이 아들이잖아~)

'아 그래여?'


제가 누군지 그제야 아시곤 다가오셔서 '느그 아브지 어릴 때 똑~같네? 마이 닮았어'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버지는 사진도 잘 안 찍으셔서 아버지의 젊은 시절은 우연히 본 운전면허증 속 더벅머리 청년밖에 몰랐어요.

그 사진을 보고도 닮은 구석을 찾아볼 수가 없어서, 속으로 '엄마도 안 닮고 아빠도 안 닮고' 출생의 비밀이 있나 늘 생각하곤 했었죠.


어르신의 말씀은 그래서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나 봅니다.

아버지의 어릴 적 모습을 알고 계시는 분들께 아버지와 닮았단 소리를 들으니 어린 시절의 저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했어요. 평소에 못 느끼던 아버지와의 유대감, 교감이 마음속으로 훅 치고 들어와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말씀을 들었던 귀의 청신경에서부터 그 뜻을 이해한 머리, 그리고 마음으로까지 쭉 던지는 묘한 기분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에 남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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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는 아버지랑 별로 안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키와 체구도 많이 작으시고 얼굴도 저랑은 느낌이 많이 달라요. 닮은 건 피부가 까맣다는 것과 젊은 시절부터 새치가 온 머리를 뒤덮었다는 것 정도일까요. 저도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머리가 하얗게 세었었어요. 아, 이 정도면 많이 닮은 걸까요? 외적인 모습으로만 봤을 때 흔히 '누구누구는 누구누구를 낳는다'에 등장하는 정도의 싱크로율은 아니에요. 왜 추성훈은 추성훈을 낳는다, 이대호는 이대호를 낳는다처럼 말이죠.

* 새치는 젊은 사람의 머리에 드문드문 나는 흰머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또, 저는 아버지랑 참 많이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어른들이 흔히 나쁜 것만 닮은다고 하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흰머리가 어릴 적부터 나서 염색하는 걸 쉬어 본 적이 없어요. 희끗희끗한 수준이 아니거든요. 성질이 급한 것도 닮았어요. 어릴 때부터 뭐든 빨리 결과가 나와야 하고 심하면 조바심도 느끼고 쉽게 형언할 수는 없지만 '아 아빠랑 똑같네' 하는 기분을 자주 느끼곤 했었어요. 스포츠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도 닮았네요. 어릴 때 저희 집은 여름이면 야구, 겨울이면 배구 소리밖에 안 들렸어요. 덕분에 채널 때문에 집안 내전도 많이 나고 공부하는 방 바로 너머 걸려 있던 TV 소리 때문에 공부가 만만치 않기도 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봐오던 거라 그런지 저도 야구, 배구 시즌이 되면 꼼짝없이 경기 시간은 중계를 봐야 해서 시간을 날린 적이 많아요. 이런 것들은 부모 자식 간에 당연한 것들일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가장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는 건, 그리고 가장 마음이 아픈 건 부자지간에 살가움이 없는 거예요.

경상도 남자에 대한 우스갯소리 중에, 경상도 아버지들은 집에 와서 3마디밖에 안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는'(아이는?)

'밥 먹자'

'자자'


그만큼 무뚝뚝하고 애정 표현에 서툴다는 말이겠지요. 주로 저희 부모님 세대에 해당하는 편견 아닌 편견,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집에 오셔서 3마디만 하시진 않았어요. 오히려 말씀은

무척 많으신 편이었죠. 밥상머리 교육, 이동 간의 교육이 아주 활발한 분이셨어요. 밥 먹으려고 앉으면 이런저런 인생 교육을 해주셨고 차를 타고 어딜 갈 때도 정말(!) 쉬지 않고 자식 교육에 애를 쓰셨어요. (그래서 차 타고 어디 멀리 가기가 싫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표현이 조금 서툴고 거칠었죠. 그래서 듣기 싫을 때도 많았어요. 다 자식들 위한 말씀이란 건 알지만 투박한 표현과 비유 속에서 본뜻은 도망가곤 하니까요. 어머니가 가끔 '느그 아브지 밖에서는 너네 자랑밖에 안 한다~'하는 말씀을 하시면 괜히 기분이 좋으면서도 더 아쉽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표현하지 않으면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도 똑같더라구요. 어머니께는 전화도 자주 드리고 덩치에 안 맞게 세상 애교 많은 아들이지만 아버지랑은 식탁에서 눈도 잘 안 마주쳐요. 당연히 살가운 말 같은 것이 오고 갈 리가 없죠. 어머니만큼이나 소중한 아버지이지만 마음을 표현하기 힘든 점이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부자지간에 다섯 마디 이상 하는 경우는 제가 배구를 할 때밖에 없습니다. 10년쯤 전부터 시작한 배구를 할 때면 아버지께서 애정 어린 조언을 많이 해주십니다. 비록 배구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부자간에 공통의 관심사로 그렇게나 많은 이야기를 한 경험이 처음이라 배구를 할 때면 아버지랑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져요. 제가 배구 대회에 더 많이 참가하려는 이유가 사실은 아버지랑 시간을 보내기 위한 부분도 있다는 걸 아마 아버지는 모르시겠죠.




머리에는 온통 흰머리가 가득하고 피부는 시커멓고 서로에게 무뚝뚝하고.

저는 어쩌면 아버지랑 무척 많이 닮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흰머리 때문에 평생을 염색해도 좋고 피부가 까매도 좋고 나이가 들어 아버지의 지금 모습을 그대로 따라가도 저는 상관이 없는데, 아끼는 마음을 쉽사리 표현하지 못하는 건 닮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이었어요. 도무지 아버지 앞에서 따뜻한 말은 나오지 않지만 운동을 하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것만으로도 예전에 비해 마음이 많이 따뜻해졌습니다. 어쩌면 아버지의 가장 닮고 싶지 않은 점을 이겨내기 위해 저 나름대로 오랜 노력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덕분에 아버지랑 있는 시간이 낯설지는 않아요 이제. 이야깃거리도 많구요. 어쩌면 끝까지 낯 간지러운 말 같은 건 못 해드릴지 모르겠지만 그때 그 어르신들이 말씀하셨던 '느그 아부지 마이 닮았네' 하는 부분에서 한 가지는 꼭 빼고 싶어요. 그 한 부분이 닮지 않은 점이 되었을 때는 이 글도 아버지께 보여드릴 수 있길 바라봅니다.




출처(reference)

1) 커버 : https://pixabay.com/ko/photos/%EC%82%AC%EB%9E%8C%EB%93%A4-%EB%82%A8%EC%9E%90-%EC%95%84%EB%B2%84%EC%A7%80-%EC%95%84%EA%B8%B0-2569393/

2) https://pixabay.com/ko/photos/%EB%B9%9B-%EB%9E%A8%ED%94%84-%EB%94%B0%EB%9C%BB%ED%95%9C-%EC%A2%85%EB%A5%98-4297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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