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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누의 서재 Aug 25. 2020

가질 수 없어야 열망하는 인간

서평 시리즈 #9 : <오후의 이자벨> by 더글라스 케네디

* 본 리뷰는 도서출판 밝은 세상의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된 글임을 밝힙니다. 

<오후의 이자벨>은 시간과 공간입니다. 찰나의 순간만 허락된 시간이기에 남녀는 서로의 존재를 탐닉하고 갈망하죠. 드넓은 파리에서 그들에게 허락된 공간은 손바닥 만한 작업실 한 칸이기에 남녀는 서로에게 열망을 품습니다.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과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샘'과 자유로운 본성에 따라 끊임없이 욕망과 욕구를 채우고 싶어하는 '이자벨'. 파리의 어느 한 좁디좁은 '공간'에서 서로를 진정한 사랑이라 믿으며 치열한 사랑을 나누는 그들은 이자벨이 허락한 '오후'라는 시간과 '작업실'이라는 공간에서 벗어나는 순간 냉혹한 현실의 벽에 부딪힙니다. 그들을 옭아매는 것은 시간과 공간뿐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현실 그 자체였던 것이죠.

사랑 그리고 욕망, 인간의 헐벗은 본성 그 자체에 따라 샘과 이자벨은 수많은 선택을 내리고 후회하고 안도합니다. 젊은 남녀 간의 불타오르는 사랑의 이야기로 단순히 치부하기엔 <오후의 이자벨>은 처절하고 추악한 '인간' 그 자체를 담고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일들을 '사랑'이라는 변명조차 붙이지 않은 채 도피와 안식의 이름으로 행하고 인간적이지 않기에 더욱 인간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동물들의 세계라면 동물이기에 그럴 수 있다 마음 한편으로 위안 삼을 수 있겠지만 인간이기에 인생의 거친 풍파 속에 점차 좌초되어 가는 그네들의 모습이 씁쓸하기까지 합니다. 

이야기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남녀 간의 욕망을 묘사하는 장면은 날것 그대로라 표현하는 것이 맞을 정도로 심박을 올리고 동공을 날카롭게 만드는 시각적 환상에 가까웠습니다. 허나 시간이 갈수록, 욕망의 묘사와 빈도가 결코 줄어들지 않아도 그들을 둘러싼 무거운 현실들이 심박이 오르는 것을 막았습니다. 사랑과 욕망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지만 현실에서도 있을 법한, 그리고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본능적인 상상마저도 뭉개버릴 정도로 쓰라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열정과 사랑을 혼동하지 마. 우리는 아주 멋진 열정을 만들어갈 수 있어. 나는 늘 우리가 함께 있는 이 시간을 기다려. 당신의 손길, 당신의 욕망, 나를 원하는 당신의 마음을 늘 기다려. 내가 좋은 만큼 당신도 느끼기를 바라. 내 욕망, 당신을 원하는 내 마음을."

<오후의 이자벨> P.63

나는 그들로부터 이자벨을 구하고 싶었다. 이자벨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쏟아 붓고 싶었다. 이자벨이 우리의 사랑을 확신하게 된다면 용감하게 주사위를 던져버리고....(중략) 나는 로스쿨을 졸업한 다음에...

다음에...

딱 거기서 막혔다. 

<오후의 이자벨> P.133

"사람들은 그런 걸 모순이라고 하지."

"누구나 모순된 삶을 살아. 사랑이 어렵지만 필요한 이유야."

"모순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또 가벼운 키스, 

"다만 인생의 조건은 고정되어 있지 않아."

이자벨이 손목시계를 흘낏 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시간이 다 됐어. 자, 이제 작별해야 할 시간이야."

"On verra(다시 만나)."

"Je t'aime"

사랑한다고 말한 이자벨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사라졌다. 

<오후의 이자벨> P.175


독자들은 둘의 사랑 속에서 가질 수 없는 것을 더욱 갈망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강하게 느낍니다. 허나, 이내 누구나 해보았을 그 어리석음의 상상 속에 몸을 던지고 이야기에 푹 빠져들게 되죠. 무한한 자유는 불안을 낳는다는 주인공의 인용구처럼 인간은 이내 파멸이라는 지름길로 빠져드는 제약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스릴 넘치는 사랑을 즐깁니다. 그리고 그 짜릿함은 상대에게 가지는 감정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여기게 만들 정도로 강렬합니다. 

<빅 픽쳐>의 더글라스 케네디가 새롭게 가져온 <오후의 이자벨>. 

처음에는 사랑의 묘사에 누워서 책을 보다 벌떡 일어나 책을 다시 잡게 되었지만 이내 펼쳐지는 인생에 대한 지독한 쓰라림, 고통, 인내, 좌절, 그리고 추악함. 수많은 곁가지의 감정들을 느끼며 사랑의 묘사가 아닌 사람의 묘사를 갈구하게 되었습니다.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야 하는 모습들을 보며 인간사를 살펴볼 수 있었고 그속에 담긴 사랑의 다른 형태를 보며 '열망'이란 무엇인가 깊이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어른의 '열망'이 그러한 것들이라면 전 열망이 없는 삶을 꿈꿀지도 모르겠네요. 사랑의 진정한 형태는 과연 무엇일까요. 아름다운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사랑의 이름으로 처절한 우리네의 인생을 그려낸 <오후의 이자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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