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누의 서재 Sep 01. 2020

고려인 소녀의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여행

서평 시리즈 #18 : <검정치마 마트료시카> by 김미승

* 본 리뷰는 다른 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여러분은 가장 길게 한국을 벗어나 다른 나라에 머물렀던 순간이 언제셨나요?

저는 고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 영국, 프랑스, 독일 3개국으로 14박 15일 해외 대학 탐방이라는 이름 아래 여행을 떠났을 때인 것 같습니다. 아, 그후로 인도에서 10박 11일 동안 봉사활동을 하고 귀국해서 그 다음날 바로 필리핀으로 창업 경진대회를 떠났던, 3주 정도 해외에 있었던 순간도 있긴 하네요. 

낯선 곳에서 낯선 공기를 맡고 낯선 음식을 먹으며 때로는 나 혼자만 다른 이목구비, 다른 피부색을 지닌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면 괜히 설레는 마음이 들곤 하죠.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뿐이지만 아무 걱정없이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에 영영 머물고 싶단 생각도 하는데요. 만약, 낯선 땅에서 영영 머물러야 한다면 흔쾌히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동아시아라는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도 강대국이 즐비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우리의 선조들은 숱한 침략을 받아왔습니다. 때로는 아무 이유없이 낯선 땅으로 끌려가 영영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죠. '고려인'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수탈에 쫓기듯 고향을 떠나 연해주 등에 정착했다가 소련의 정책으로 춥고 척박한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당한 우리의 선조들. 

소련말로 '카레이스키', 우리말로 고려인. 뜻하지 않은 머나먼 여정에 몸과 마음이 멍들었지만 언젠간 꼭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기에 지붕에서 물이 새어도 고치지 않았다는 그들. 

<검정치마 마트료시카>는 일제로부터의 해방 직전 차디찬 동토인 사할린에서 벌어진 고려인들의 이야기를 그려낸 책입니다. 저자인 김미승 작가께서는 어느날 우연히 알게 된 사할린 한인과의 만남이라는 행사에 끌리듯이 지원했다고 해요. 그러곤 러시아의 동쪽 끝 외딴 섬인 사할린 땅으로 훌쩍 떠나서 '김 알렉산드라'님과 김윤덕 옹을 만나게 됩니다. 조선인 부모를 둔 김 알렉산드라님과 아버지 대신 강제로 징용되어 결국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김윤덕 님을 보며 <검정치마 마트료시카>를 구상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청소년 문학입니다. 책은 200페이지가 조금 안 되는 길이로 금세 읽어낼 수 있고 복잡한 전개 없이 빠르고 시원시원한 이야기 흐름을 보여줍니다. 길이, 플롯과 같은 책의 얼굴이랄까요. 그 외향은 결코 무겁지 않은 가볍고 경쾌한 느낌이지만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무겁게 다가오는 그 내면은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김 알렉산드라 님을 모티브로 한 '쑤라'는 자신이 태어나기 직전 러시아로 귀화한 조선인 아버지를 둔 소녀입니다. 현대에도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과 우월감을 드러내는 것이 인간인데 그당시에는 오죽했을까요. 쑤라는 괄시받지 않기 위해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시는 '기 죽지 마라'라는 말을 가슴속에 새기며 씩씩하게 살아가요. 그럼에도 금발에 하얀 피부를 가진 그들 사이에서 검은 머리에 노란 피부인 쑤라는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죠. 아버지와 동포들이 보여주는 행동에 대해 의문을 갖습니다. 


그러던 중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에 의해 쑤라는 15살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인생의 격변기를 맞이합니다. 아마 저라면 버텨내지 못했을 거에요. 김 알렉산드라 님께서 실제로 겪으신 일이라고 하기에 책을 덮고 나서 마음이 더 아려왔습니다. 광활한 러시아 땅을 가로질러 사할린으로 홀로 떠나 갖은 고생을 합니다. 그러곤 마침내 깨닫습니다. 소설에서 끊임없이 자문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어요. '정체성'에 대한 답이죠. 

<검정치마 마트료시카>는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귀화한 조선 출신 러시아인, 자신은 검은 머리 러시아인, 허나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 그녀에게 조국은 무엇이었을까요? 민족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웃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을 둘러싼 물에 쉽게 섞일 수 없었던 한 소녀가 마침내 자신만의 답을 찾고 살아가는 이야기. 

김미승 작가는 책의 말미, 마지막 페이지에 이런 말을 전합니다. 쑤라의 생각을 통해서요. 

쑤라는 이제 분명히 알 것 같았다. '어디서 살까'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살까'가 중요하다는 것을. 

(p.193)

책을 읽고 궁금해졌어요. 쑤라는, 김 알렉산드라 님은 '어떻게 살아오셨을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선택한 삶의 방식이 그녀에게 무슨 의미였는지 궁금했습니다. 저라면 어떻게 했을지도 생각해보게 되었구요. 


여러분이라면 낯선 사할린 땅에서 어떤 삶을 사실 건가요? 뜻하지 않았던, 영영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랐던 그 여정 속에서. 

15살 소녀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세상을 살아가는 법이 담긴 이야기, <검정치마 마트료시카>였습니다. 




* 본 리뷰는 다른 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출처(reference) : 

1) https://unsplash.com/photos/b94-EgA1D8k?utm_source=naversmarteditor&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api-credit

2) https://unsplash.com/photos/2LowviVHZ-E?utm_source=naversmarteditor&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api-credit

매거진의 이전글 글로 느끼는 피오르의 황홀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