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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누의 서재 Sep 06. 2020

인간으로 태어나는 건 형벌이다?

서평 시리즈 #26 : <심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중학교 1~2학년 때쯤? '개미'라는 책을 학교 도서관 서가에서 발견했다. 표지에 개미가 그려져 있는 책을 집어 들고서 무슨 은유가 들어간 소설일까 한참 고민했다. 점심 저녁 시간에 친구들과 공을 차느라 공부와는 담을 쌓고 있던 시절이었지만 이상하게 끌려 책을 펼친 순간 진짜 개미 이야기였다. 개미가 주인공이라니! 

처음 접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이 개미였던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다행이었다. 그의 책이 무척 어려운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어도 철학적이고 오묘한 작품 또한 많다고 생각한다.  다른 책을 먼저 접했으면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고 도무지 담겨 있는 속뜻을 깊게 이해하지 못해 한참을 하루키의 소설을 찾지 않았던 것처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 또한 시간의 뒤편에 묵혀 두지 않았을까. 개미는 경험하지 못했던 상상의 끝을 달리게 만들었고 그의 작품을 찾게 만들었다. 

<심판>은 꽤나 오랜만에 읽게 된 그의 작품이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이야기꾼이라 평가받는 작가의 세계관에 자주 등장하는 '죽음', '사후세계', '환생' 등을 소재로 한 그의 두 번째 '희곡'이다. 첫 번째 희곡인 '인간'을 읽어보지 못했기에 <심판>의 서술 방식이 너무나 특별하게 다가왔다. 고등학교 때 극 작품을 배울 때나 볼 수 있었던 표현들이 출간되어 나오는 책에 실려 있다니! 

책 자체도 200페이지 가량으로 길지 않은데 대부분이 극중 인물의 대사로만 처리되어 있어 이야기가 진행 속도가 무척이나 빠르다. 대사 또한 호흡이 짧은 편이다. 덕분에 집중력이 그리 좋지 않은 나도 굉장히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특히나 문학 작품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기에 '희곡' 작품이 낯설어 그렇게 느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머릿속으로 각자의 '아나톨', '카롤린', '베르트랑', '가브리엘'을 상상하며 그들이 실제로 내뱉은 것처럼 가상의 연극을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었다. 읽는 독자만의 연극을 한편 연출하게 만드는 그의 글 솜씨와 희곡이라는 작품의 특성이 몰입도를 몇 배로 배가시킬 수 있었다. 

<심판>은 시작부터 재미있는 요소가 많다. 아나톨의 수술을 집도하는 두 명의 의사부터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이야기에 본 이야기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리게 만든다. '처음에 나오는 사람들이 이렇게 정신 나갔다고?'

카롤린, 베트르랑의 긴긴, 아주 긴 인연도 극의 긴장도를 낮춰주는 요소이다. 치고받고 싸우며 긴긴 인연의 끝을 이어가는 그들은 가끔 사적인 영역으로 들어가 아나톨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철학이라는 다소 복잡한 주제에서 독자들을 잠시 쉬게끔 만들어준다. '심란한 사람을 앞에 두고 OO 싸움이라니' (책을 읽어본 분이라면 OO에 들어갈 단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극의 후반부, 3막에 이르러 또 한 번 흥미로운 서사가 나왔다. 인생에 대한 선택을 내리는 아나톨, 그에게 여러 조언을 건네는 카롤리, 베르트랑, 가브리엘의 모습을 통해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전하고자 하는 철학이 드러난다. 하고픈 이야기는 짐짓 진부한 이야기일 수 있으나, 그 방식이 마음에 든다. 직전 2막에서 베르트랑의 말을 통해 '주어진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은 것은 인생을 낭비한 극심한 죄'라는 표현과 맞물려 하루하루 별 탈 없이 살아가는 것이 큰 기쁨인 우리에게 가벼운 고민을 던져주며 3막까지 막을 내린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은 인류의 보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내게는 여전히 그의 상상력이 기쁜 선물이다. <심판>을 펼쳐든 시간은 새벽 5시였다. 자기 직전에 10분만 읽고 잔다는 것이 훌쩍 그 끝을 보고야 말았다.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4명의 주인공, 그리고 그 밖의 인물들이 펼치는 부지런한 연극 때문이었으리라. 개인적으로는 '희곡'이라는 형식에 푹 빠질 것 같다. 전작인 <인간>도 한 번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책이 주는 매력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다음 밟을 길,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읽을 책을 인도해 주는 묘미. 

삶의 내리막길을 한창 걸어가고 있기에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이럴 때 <심판>을 접한 건 예전의 누군가가 설정한 카르마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가벼운 마음을 인생을 생각하기 좋은 책, 희곡의 매력에 빠지게 해준 고마운 책 <심판>이었습니다. 




* 본 도서는 열린책들의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출처 :

1) https://unsplash.com/photos/WvebgOkP4LE?utm_source=naversmarteditor&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api-credit

2) https://unsplash.com/photos/WW1jsInXgwM?utm_source=naversmarteditor&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api-credit

3) https://unsplash.com/photos/82TpEld0_e4?utm_source=naversmarteditor&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api-cr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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