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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누의 서재 Oct 28. 2020

'사고'마저 기계에 맡겨버린 사람들

서평 시리즈 #64 :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니콜라스 카

인간의 100m 세계 최고 기록은 우사인 볼트의 9.58초이다. 단순하게 계산하면 시속 37.5km, 일반인 입장에서는 '총알'같다고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울음소리가 특이하고 귀여운 치타는 시속 110km의 속도로 최소한 10초보다는 오래 달릴 수 있다. 


탄력이 좋은 사람들이 수직으로 뛸 수 있는 높이는 1m  남짓. 동물계에서 이 정도 높이는 조그마한 고양이도 뛰어오를 수 있는 높이이다. 힘 또한 마찬가지이다. 인간보다 강하고 무시무시한 동물은 이 넓은 세상에 널려 있다. 


사실 인간은 야생의 '동물' 한 종으로서는 나약한 존재이다. 종 자체의 물리적인 강인함을 두고 서열을 매긴다면 인간의 위치는 저 맨 끝 어딘가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어떻게 지구에서 가장 강력하고 포악한 존재로서 군림할 수 있었을까? 아마 고도로 발달된 지능을 가지고 사고하는 능력을 키워왔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러한 인간의 사고의 근원을 파고든다. 인간의 지성이 어떤 과정을 거쳐 갑작스럽게 폭발하게 되었는지, '사고'가 인간에게 무엇을 선사했는지 이야기한다. 동시에 인간의 '사고하는 힘'이 처한 위기를 역설하기도 한다. 사고와 사유의 결정체와도 같은 IT 기술에 의해 인간의 생각이 무너지는 과정을. 



'플라스틱'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딱딱한 재질의 석유 화합물이다. 어느덧 세상에서 가장 흔한 물질이 되어 버린 플라스틱에는 사실 '성형이 가능한'이라는 어원이 숨겨져 있다. 때문에 'plasticity'는 가소성, 즉 변형이 될 수 있는 성질을 의미하게 된다. 다소 생소한 이 단어를 처음 본 것은 3년 전쯤 '뇌의 가소성'을 다루는 과학 관련 포스팅에서였다. 인간의 뇌가 플라스틱이라는 말, 아니 다시 말해 인간의 뇌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따라 변화한다는 말. 단순히 생각이나 태도가 바뀌는 수준을 넘어 그 형태까지 변할 수 있다는 말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매일같이 반복하는 일을 습관 기억에 저장하고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을 변환하여 다시 꺼내며 생각의 넓이는 확장하는 일은 인간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뇌의 용량이 크지 않을 때에는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사고만이 있었다. 조금씩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인간 군집의 수가 늘어가며 오고 가는 이야기가 많아지게 되었다. 친구와 나눴던 이야기나 기록으로 남겨두었던 이야기를 기억에서 끄집어 내어 다시 생각하게 되면서 인간은 점차 '깊이 생각하기'라는 행위를 하게 된다. 기억을 확장시키고 기억을 다른 기억과 빠르게 연결하여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일을 인간의 뇌가 할 수 있게 변화한 것이다. 가소성은 분명 인간이 사고를 확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구텐베르크의 활자 혁명 덕분에 사고의 깊이는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밀과 쌀이라는 작물에게 지배당하게 했던 농업 혁명, 인터넷 혁명이 그러했듯이 기술의 진일보는 인류에게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게 한다. 전문 필경사에게 전하고 싶은 내용을 불러주어 책을 만들었던 구술의 시대에서 활자의 시대로 넘어간 순간 인류의 지식은 폭발하기 시작한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이전 수천 년 동안 만들어진 책보다 이후 몇십 년 동안 출간된 책의 수가 더 많다고 할 정도이니 인간은 지식을 끝없이 탐나는 존재가 맞긴 한가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좁디좁은 자신의 세상을 확장시킬 수 있었고 너도 나도 책을 쓰고 싶다고 욕망하기에 이른다. 이는 결국 르네상스 무렵의 과학 혁명으로까지 이어져 인간의 문명은 급작스러운 대발전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기술의 제국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인터넷이라는 인간 최고의 발명품이 등장한다. 인간의 기술 또한 발전하는 양상은 항상 지수 함수의 모습을 띤다. 전화선에 모뎀을 연결했던 시절에서 초고속 인터넷이 등장하고 마침내 구글이 검색 시장의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오자 수백 년 전 구텐베르크 시대가 그러했듯 인간은 또다시 지식의 대폭발을 경험하게 된다. 

인터넷과 구글은 정보를 찾는 과정과 정보를 기억하는 과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버렸다. 어떤 정보든 필요할 때에 찾을 수 있게 됨으로써 지식은 '찾는 것'이 되어버렸다. 기억은 인터넷망이나 클라우드 속에 남겨 두고 인간은 보다 빠르고 적확하게 필요한 정보를 찾기만 하면 된다. 여기에 '가소성'은 이제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퇴보시키는 요소가 되었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기억하는 과정, 사고하는 과정은 수없이 쏟아지는 인터넷상의 정보에 의해 인간이 이룩하기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삶의 중간부터 스마트폰과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접한 현대인도 빠르게 변한 뇌 때문에 집중력을 잃어버렸는데 태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을 만지는 아이들은 뇌가 우리와는 조금 다르게 형성될지도 모른다. 기억을 만들고 사고하는 과정에 접근하지 못하고 지식을 내재화하는 일 자체에 대해 기존과는 반대의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 


진보한 기술에 인간의 모든 것을 맡기려는 현상. 하루에 3만 번이 넘는 크고 작은 의사 결정을 인공 지능이 하도록 맡기고,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기억을 인터넷 서버 어딘가의 데이터 조각으로 남겨두려는 일. 인간이 그토록 원하는 미래상이 과연 이런 모습이었을까? 저자는 마지막 남은 인간 고유의 영역을 기계에게 넘기는 순간, 인류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라고까지 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그 옛날 로봇의 3원칙을 '소설 속'에서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발전한 기계 문명이 이를 지키려 들까. 습관처럼 행하는 작업 기억이라는 단기 기억이 아닌 감정과 감성, 고유한 기억을 장기 기억 속에 차곡차곡 옮겨 담고 새로운 생각과 끼워 맞추는 것이 '사고'라는 인간만의 고유한 강점이었다. 기억의 전권을 위임하고, 기계가 데이터를 통해 새로운 생각(데이터)을 도출하게 만드는 것은 '사고'하는 힘을 쥐여주는 셈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놀라운 기억력과 처리 능력을 갖춘 기계가 '사고'를 통해 어떤 일까지 벌일 수 있을지를 상상해보는 것은 지나치게 디스토피아적인 생각일까.

 


저자는 서두에서도 언급한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마지막 장면을 통해 책을 마무리한다. 서서히 해체당하는 컴퓨터 '할'이 끝까지 내뱉은 탄성과 절규. 그에 반해 마치 현대의 기계처럼 효율성만을 강조하며 소수의 일만 처리하는 인간. '생각'이라는 아름다운 행위마저 기계에 넘기려는 인간들은 영화 속의 그 냉랭한 인간들처럼 그 자신이 기계가 되고 싶다는 것일까. 생각하는 행위를 통해 되려 인간다운 감정마저 표현할 수 있게 된 컴퓨터 '할'은 '생각'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감독의 메시지는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인간 본연의 존재 이유에 대한 깊은 '생각',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 본 리뷰는 청림출판의 도서 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 출처 : 

1) https://pixabay.com/vectors/question-questions-man-head-2519654/

2) © andreas160578, 출처 Pixabay

3) https://unsplash.com/photos/c4aT8MfEzdw?utm_source=naversmarteditor&utm_medium=referral&utm_campaign=api-cr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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