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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누의 서재 Nov 01. 2020

모든 그림에는 인간의 욕망이 숨겨져 있다

서평 시리즈 #68 : <욕망의 명화> 나카이 쿄코

인간에게 가장 익숙한 예술 분야는 무엇일까?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이 음악이라고 답할 것이다.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귀에 꽂힌 이어폰 너머로 제각기의 취향에 맞게 들려오는 음악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을 준다. 

음악 다음가는 예술은 무엇일까. 최근의 음악들은 대개 가사말이 함께 한다.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오지만 분명히 들리는 가사말 덕분에 해석의 폭이 극과 극으로 나뉘는 경우는 잘 없다. 매일 듣는 음악으로부터 영감이 부족할 때 우리는 미술관을 찾는다. 화폭 안의 그림을 보며 누구든 자신만의 감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기에 미술은 음악과는 또 다른 특별한 감상을 준다. 미술만이 주는 영감의 주관성, 그것이 미술이 음악 다음으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예술인 이유일 것이다. 


<욕망의 명화>는 작가들이 담아내고픈 욕망을 잔뜩 머금은 그림을 이야기한다. 그림 한 점 한 점에서 느껴지는 인간 세계의 보편적인 진리를 함께 풀어낸다. 보는 이에 따라 하늘과 땅 차이의 감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미술이라 했다. 수 년의 시간이 걸려 완성된 작품의 뒷이야기를 통해 그 하늘과 땅의 간격을 더욱 넓히고 감상자에게 전에 없던 영감의 희열을 안겨주는 것이 <욕망의 명화>가 주는 기쁨이다. 

중고등학교 때 미술 수행 평가에서 늘 반 꼴찌를 하던 나는 미술적 영감을 느껴본 적이 없지만 위대한 작품에는 모두 저마다의 모티프가 존재한다. <욕망의 명화>에서 다루는 작품들이 대부분 중세 유럽의 것이기에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기독교 사상과 성서, 유대인과 관련된 것들이 반영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해당 모티프에는 다시 인간의 본질적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사랑', '지식', '생존', '재물', '권력'이 바로 그것이다. 때문에 <욕망의 명화>는 다섯 가지 욕망을 기준으로 욕망이 투영된 작품들을 차례로 소개한다. 

■ 모리스캉탱 드 라투르의 <퐁파두르 후작>

부르봉 왕가의 핏줄에는 우울증의 어둠이 스멀스멀 흐르고 있었다. 루이 15세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자신의 피에 흐르는 우울증은 앓지 않을 수 있었다. 다양한 이유들이 있었지만 그의 '총희'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있었던 까닭도 컸다.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왕의 '공식 총희'로서 해당 '지위'는 단 한 명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단순히 왕의 정부로서 사랑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그녀는 무척이나 영리한 사람이었다. '지식의 욕망'을 보여주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모리스캉탱 드 라투르의 <퐁파두르 후작>을 보면 그녀라는 사람을 알 수 있다. 책상을 가득 채운 책들, 장신구를 하나도 걸치지 않고 '공사'를 구분할 줄 아는 현명함, 멋진 드레스를 걸치고서 국가의 의복 산업을 주도했던 모습이 모두 투영되어 있다. 그녀는 실제로 루이 15세가 정치에 관심도 소질도 없는 것을 알게 되자 실질적인 국가의 재상이 되어 정책에 많은 관여를 했다. 기품 있어 보이는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뿐만 아니라 그녀의 지적 욕망과 강대한 야심이, 그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통해 그림 너머로 드러나는 것이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아마 이 유명한 작품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최후의 만찬을 그렸던 수많은 작품들과는 다르게 독특한 구도를 지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을까? 또한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그림 속에 숨겨진 예수와 12사도의 자세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을까? <욕망의 명화>에는 기독교 사상과 관련된 작품이 많이 등장한다. 덕분에 인류의 절반을 이루는 서양, 서양의 근간이 되는 기독교 문화에 대해서도 폭넓고 깊은 교양을 쌓을 수 있다. 예수를 은화 서른 닢을 받고 팔아넘긴 유대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사랑'에 대한 욕망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다. 자신이 사도 중에서 예수를 가장 사랑한다고 여겼던 유다는 예수 또한 자신을 가장 사랑해 주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자신의 충고를 무시하고, 점차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 되어 간다. 동경하는 인물을 향한 사랑은 변질되어 배신이라는 암울한 결과를 낳게 되었고 배신으로 인해 예수를 잃은 유다는 되려 더 이상 삶을 지속할 수 없었다. 이성 간의 에로스적인 사랑이 아니더라도 '사랑'이라는 감정은 인간의 가장 본연적인 감정이다. 다빈치의 그림 속에서 이 모든 모티프를 읽을 수도, 맥락을 파악할 수도 없다. 오히려 맥락을 파악한 후 그림을 보면 인류의 걸작이 다시금 새롭게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그림의 본질과 내면을 공부하고 바라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 일리야 레핀의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세상에 작은 울림을 주기를 원한다. 그 울림은 사랑의 위대함, 진실함의 소중함 등이 될 수도 있지만 이기적이고 잔혹한 인간성에 대한 고발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은 작품들이 사회 고발의 성격을 띤다. 

때로는 강렬하게, 때로는 뭉근하고 은은하게. 

러시아의 화가 일리야 레핀 또한 볼가강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현장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네바 강을 천천히 거닐다 세련된 신사와 숙녀들 사이로 후줄근한 누더기 옷을 걸쳐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배를 '끌어당기는' 것을 목격했다. 빈부의 격차, 인간의 잔혹성을 고발하기 위해 이를 스케치해서 친구에게 보여준 레핀은 볼가강으로 가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볼가강에는 밧줄에 몸을 질끈 동여매고 거대한 범선을 뭍까지 끌어당기는 인부들이 가득했다. 이 얼마나 참혹한 광경인가.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에는 생명의 끈질김이 묻어 나오기도, 같은 생명에게 참담한 일을 부여하는 인간의 비인간성이 드러내기도 한다. 탈옥수, 탈영병, 불법 이민자들로 구성되어 한 마디 불만도 없이 주름살 가득 구겨진 얼굴로 배를 끄는 이들의 그림은 그렇게라도 견뎌야 했던 인간들과 그 옛날의 어두움이 공존한다. 


교양이라곤 없게 생겼지만 전시회를 가는 것을 무척이나 즐긴다. 미묘한 구도로 아름답게 구성된 갤러리를 거닐다 보면 화폭에 담긴 그림들로부터 실제로 어떠한 영감을 받는 느낌이다. 키스 해링의 낙서로부터 자유분방한 미래를, 사진 그룹 '매그넘'의 사진전에서는 프랑스 파리의 혁명적 자유를 느낄 수도 있었다. 보는 방식도, 보는 이유도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손으로 그려낸 예술 작품은 영감의 향연이다. 그야말로 제멋대로 마음껏 상상해도 된다. 그 상상을 증폭시킬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그림의 근원을 탐구하는 일이 될 것이다. 

<욕망의 명화>는 기독교 사상, 중세 유럽의 문화, 예술가의 배경 등 다양한 근원을 마구마구 쏟아내었다. 매우 정돈된 방식으로. 덕분에 그 유명한 작품들을 직접 눈으로 담지 않아도 나름의 멋진 영감들이 떠오른 느낌이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명화들이 전시된 해외의 유명 미술관은 물론 국내의 미술관도 방문이 힘든 요즘 책을 통해 미술이 주는 영감을 만끽해 보는 것은 어떨까. 친절한 설명 덕분에 직접 눈으로 담는 것보다도 강렬한 상상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속의 욕망을 통해 영감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욕망의 명화>였습니다. 



* 본 리뷰는 북라이프의 도서 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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