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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화영 Jul 04. 2023

6. 시련을 겪고, 디디면, 단단한 땅이 된다

내가 그들에게 인생 여정을 되돌아보라고 요청했을 때 비즈니스 리더들이 대부분 동의한 한 가지가 있었다. 그들은 부정적인 사건, 스트레스가 많았던 시기, 실패하거나 좌절했던 순간에서 가장 많이 배우고 성장했다고 인정했다.

<유연함의 힘>
수잔 애쉬포드, <유연함의 힘>

책의 저자인 수잔 애쉬포드 교수는 전도유망한 CEO들을 가르친다. 그녀가 진행하는 경영자 프로그램에서 빠지지 않는 훈련이 '삶의 궤적 훑기'이다. 즉 인생 여정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경험을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역설적이게도 시련에서 가장 많이 배우고 성장했다는 문장은, 가슴을 때렸다. 누구나 있지 않나.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 내게도 그런 기억이 있었다.


'삶의 궤적 훑기'라는 걸 나도 한 번 해 보기로 했다. 오랫동안 묵혀 둔 기억을 꺼내는 게 쉽지 않지만, 이 글의 마지막이 되었을 즈음엔 후련하지 않을까? 그렇게 기대하는 마음으로.


누구나 있지, 지우고 싶은 기억 하나쯤은.

나의 가슴 따끔거리는 기억들은 거의 다 가족과 관련돼 있다. 열심히 살아온 엄마, 아빠였으나 잘못된 선택 몇 가지로 인해 가족의 행복은 오랫동안 먼발치에 있었다. 부모님의 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서 육 남매 중 절반이 신용불량자가 됐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빚을 지고 야반도주를 한 적도 있었다. 후폭풍은 오래갔다. 그래서 학교에 제때 가지 못했다. 15살 때 5,60대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초졸 검정고시를 봤다. 다음 해 그토록 가고 싶던 학교에 갔고, 친구를 사귀었다.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엄마, 아빠는 죄책감 대신 어떻게든 다시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겠다는 의지로 사셨다. 안타깝게도 그 의지가 더 많은 빚을 만들었다. 성인이 된 언니와 오빠들은 그 부담을 고스란히 짊어졌다.


가족 모두 그때의 일을 언급하지 않는다. 각자의 역할을 하느라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그래서 지금 불행하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행복에 겨운 날들을 보내고 있다. 가족들의 사이가 지금보다 더 좋았던 적이 없었다. 작은 오해가 쌓여 몇 년 간 부모님과 왕래 없이 지내던 큰오빠는 올해 아빠 생신 기념 가족 외식을 함께했다. 모두 모여서 셀카모드로 사진을 찍는데 10명이 넘으니 사진에 다 담기지가 않았다. 내 얼굴은 거의 절반이 잘려버렸다. 그게 너무 감격스러웠다. 얼마만의 가족사진인가.


고통의 직격타를 맞았을 때에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딱 그만큼 어렸고, 넓고 깊게 사고할 줄 몰랐다. 그렇다고 지금 현자가 되었다는 건 전혀 아니다. 여전히 철딱서니 없는 짓을 많이 한다. 그래도 딱 하나 변한 게 있다면, 평범함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는 것. 그게 내가 시련을 겪고 난 후 얻게 된 가장 값진 교훈인 것 같다.


평범하게 학교에 다니는 게 소원이었던 15살 소녀는 1년 후 그 소원을 이뤘다. 내가 다른 아이들과 똑같아졌다니... 평범이 최고의 기쁨이었다. 급식이 맛없다고 투덜대는 친구들 틈에서 나는 누구보다 맛있게 먹었다. 교실에 앉아 있는 내가 좋았다. 청소당번이라 짜증 나지 않았다. 수능을 치르고, 대학에 입학하고, 취직하고, 결혼을 했다. 그 사이에 수많은 일이 있었고 그때마다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그 고통들이 평범한 대한민국 성인이라면 겪을 통과의례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더는 불행이라는 프레임에 갇히지 않았다.


평범이 최고의 기쁨이었다.
"아무도 자네들을 도와줄 수 없네. 자네들이 자신의 스승이 되어 평생 가르쳐야 하네."

<유연함의 힘>에서 인상적이었던 문장이다. 그렇다. 아무도 내 경험에서 내가 깨달은 점을 조언해 주지 못한다. 현재의 나, 미래의 내가 스승이 되어 과거의 나에게 이야기할 뿐이다. 아무도 너의 고통을 대신해 줄 수 없고, 그 고통으로 얻은 교훈 역시 아무도 너보다 깊은 울림이 있지 않을 거라고.


시련을 겪고, 디디면, 단단한 땅이 된다. 그 땅이 있으므로 내가 당당하게 설 수 있는 것 아닌가. 지칠 때면 이 말을 떠올리자. "시련에서 가장 많이 성장한다잖아."라고.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고 평생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이어간다면, 죽는 그날까지 한 뼘 더 성장하게 될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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