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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화영 Jul 13. 2023

12. 오만하지 않고, 그러나 신중하게.

말의 힘에 대하여

내가 뱉은 말의 영향력은 어디까지일까? 상담을 원한다며 내게 만남을 요청하는 사람. 답 없는 고민에 빠져 혼자 힘들어하는 것 같아 내가 먼저 말 붙인 사람. 그들에게 나는 불씨가 되는 한 마디를 던졌을까? 아니면 하고 말고 한 이야기로 치부됐을까? 말의 힘은 놀라워서 늘 조심해야 하지만, 섣부른 판단으로 주워 담을 수 없는 헛소리를 지껄일 때가 있다.


8년 전으로 기억한다. 같은 과 후배에게서 뜬금없이 전화가 왔다. 갓 졸업한 후배였고 취업에 성공했는데, 합격한 곳에 갈지 말지 고민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나와 같은 업계였다. 나는 후배의 말을 듣고 단칼에 대답했다. "당연히 가야지. 좋은 데잖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후배의 평소 태도, 성향으로 짐작할 때 적성에 맞을 것 같았다. 고된 일이 있더라도 잘 헤쳐나갈 거라고 믿었다. 내가 아는 선에서 몇 마디를 더 하고 난 후 통화를 마쳤다. 후배는 고민하던 회사에 출근했다. 같은 업계 동료를 한 명 얻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몇 개월이 지났을까? 후배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는데, 결론은 명료했다. "너무 힘들어요. 진짜 죽겠어요." 후배는 주말도 없고, 자기 생활도 없이 매일 일에 치여 사는 자신을 설명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별다른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때 잠깐 스쳤던 생각은 이랬다.


'내가 괜한 얘길 해서 한 사람을 힘든 길로 인도했구나.'


남의 인생을 너무 가볍게 여겼던 것 같아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앞으로는 조언이랍시고 함부로 말하지 말자.


2년 후 나는 함께 일했던 작가에게 이런 부탁을 받았다.


"제가 아는 동생이 있는데, 이 친구가 FD(방송 현장 진행 스태프)를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언니랑 연결해 주려고 하는데, 괜찮아요?"


쉽게 수락할 수 없는 요청. 부담감에 대답하기가 망설여졌다. FD를 하면서 배운 것 많고 나름 만족했지만, 나는 계약 만기일가 정해진 프리랜서였다. 나도 내 미래가 불투명했다. 그런 내가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만남을 요청한 그분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FD 일을 당장 시작하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다른 일을 하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그 자리에 앉아 대답을 망설이는 나는 뿌리가 충분히 뻗지 못해 약한 바람에도 비실거리는 나무 같았다.


2년 전 후배에게 쉽게 이야기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정중히 거절 의사를 밝혔다.


"죄송한데, 제가 뭐라 조언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제 코가 석자라서."


그 후 6년이 지났다. 공중파 방송사에서 FD로 일하다가 유튜브계로 넘어와 아등바등 적응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그만큼 흘렀다.


가끔 나를 만날 뻔했던 그분을 떠올린다.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정보가 많지 않으니까 어떤 이야기라도 듣고 싶었지 않았을까? 사소한 경험이라도 공유했더라면, 부족하지만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래도 후회, 저래도 후회라면 그냥 만났어야 했던 것 아닐까? 그때 만남을 갖지 못했음에 미안한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다.


“오만한 생각이지.”


대기업에 다니다 퇴사하고 오랜 꿈이었던 교사의 길을 걷고 있다는, 어느 분의 말이다. 교사라면 말의 영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분이다. 미성년인 아이들은 선생님이 하는 말로 아직 겪지 않은 세상을 상상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짐작한다. 그런 아이들에게 자신의 말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될까? 어쩌면 아이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겠다.


그분은 그런 생각을 스스로 오만이라 불렀다. ‘아이들에게 그렇게 대단한 영향을 줄 만큼, 난 대단하지 않다’는 뜻일까? 직접 이야기해보지 않았으므로,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라는 직언으로 가름해야겠다.


내가 뱉은 말은 누군가에게 분명 영향을 준다. 그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삶은 원인과 결과가 매끈하게 연결되는 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한 건 있다. 말에는 엄청난 힘이 있다는 것. 그래서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는 것. 그러니 오만하지 않되 신중하게 말하자.


일이 힘들어 죽겠다고 말했던 그 후배는, PD가 됐다. TMI를 말하자면, 얼마 전에 결혼도 했다. 들으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방송 프로그램 제작을 맡고 있으니 꽤 출세했다. 후배는 최근에도 여전히 이렇게 말했다. "힘들어 죽겠어요.“ 별 뜻 없이 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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