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가을의 어떤 날.
동네 공원 벤치에 두 사람이 30분 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각자의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것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 네다섯이 농구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슈나우저를 산책시키는 중년의 여성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저 개, 생긴 게 할아버지 같다. 쿠도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몰랐다. 애초에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비움의 시간이 필요했다. 어떤 것도 담지 않고 그저 소화하는 그 비움의 시간이.
“잘했어.”
그렇게 둘이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앉아있었다는 걸 뒤늦게 인지했다. 아차 싶어 말을 걸려던 순간 하야마가 먼저 입을 뗐다. 대뜸, 잘했단다. 노을이 지던 참이라 쿠도의 눈에 하야마의 옆얼굴은 상기된 듯 붉게 보였다.
“뭘 잘했다는 거야?”
영문을 몰라 묻는 쿠도의 말에 끙차,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난 하야마는 편의점 로고가 새겨진 하얀 봉투에 빈 주스병을 담으며 말했다.
”너 멍 때릴 때가 생각 존나 많을 때잖아.”
여전히 주스병에 시선을 둔 하야마가 한 손으로 봉투를 집어 들자 안에 있던 주스병 두 개가 부딪치며 짤랑거렸다. 그 소리에 반쯤 풀린 눈에 입술이 살짝 벌어진 쿠도가 잠에서 깬 것처럼 눈을 두어 번 끔뻑거리다가 말했다.
“미안. 불러놓고 딴생각했다.“
”어. 그것도 잘했어.“
잘했어.
무미건조하게 뱉어낸 말 같아 흘려보내기 쉽지만, 쿠도는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하야마는 평소 똥 씹은 표정이 디폴트값이라 사람들은 고집 세고 제멋대로인 양아치로만 본다. 가끔 양아치 같을 때도 있긴 하지만, 정말 악질스러운 인간이라면 자신이 싫어하는 음료수를 쿠도가 건넸다는 이유로 깨끗이 비웠을 리 없었다. 먹고 난 쓰레기를 저리도 곱게 치울 리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야, 있어 봐.”
벤치에 음료가 흘러 있는 걸 발견하고 쿠도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하야마가 귀찮다는 듯 혀를 차며 물티슈 한 장을 뽑아 자리를 말끔히 닦았다.
잘했어.
그 말엔 배려가 묻어 있었다. 쿠도에게는 그 말이 이렇게 들렸다. 네가 아무 말 않더라도, 어떤 일이 있었건, 어떤 생각을 하건, 어떤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건, 답을 어떻게 내리건, 너를 믿겠다는 응원. 에너지가 고갈되어 말 한마디도 꺼낼 힘도 없는데,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싶은 순간 내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쿠도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근데 너는 아무거나 사 오랬더니 하필 토마토 주스를 골랐냐. 케첩을 왜 돈 주고 마셔?”
“그것도 잘했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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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내용은 픽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