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맛동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다양한 시층을 가진 문래동 매력 맛집

영단주택 단지 일본 라멘집 ‘로라멘’‧여성고객층 두꺼운 주점 ‘아스팔트’

[유성호의 맛있는 동네 산책] ‘스틸타운’ 문래동은 근현대사의 다양한 시층을 가진 공간이다. 일제 강점시기인 1940년대 계획적으로 개발된 대규모 주택단지인 영단주택이 아직도 남아있고 80년대 수도권정비계획에 따른 도심 제조업체가 이전해 오면서 금속제조상이 자연발생적으로 밀집한 지역이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울 제조업이 쇠퇴하고 IMF 타격을 받으면서 공장들이 다시금 시 외곽으로 이전하면서 빈 점포가 나오기 시작했고 이 공간을 예술인들이 하나 둘 채워가면서 문래동 창작촌을 형성했다. 


가까운 홍대나 대학로의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튕겨져 나온 예술가들이 문래동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미술, 사진 등의 시각예술 장르뿐만 아니라 댄스, 연극, 전통 악기, 비평, 건축, 문화 활동가 등 다양한 분야가 모여 창작촌이 형성됐다.     


도시재생 과정이 대부분 문화예술인들이 먼저 들어와 거리와 골목에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사람들을 모으면 맛집과 트렌디한 상점들이 따라오는데 문래동 역시 같은 방식으로 개발되고 있다. 문래동의 변화는 두터운 시층이 말해주듯 급격하지 않고 은근하지만 ‘핫’하다.     


지금도 한쪽에선 쇳소리와 용접 불꽃이 튀지만 옆집에서는 부드러운 재즈 선율을 들으며 와인, 수제맥주을 즐길 수 있는 하이브리드 한 공간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한적한 시골 마을이던 문래동의 변화가 시작된 것은 영등포가 공업도시가 되고 서울로 편입되면서 노동자들이 몰리면서부터다.     


용접불꽃 가운데 흐르는 재즈 선율 ‘하이브리드 공간’    


1919년 영등포구 영등포동에 최초의 방직공장인 경성방직이 들어선 후 인근에 피혁공장과 철도공작창이 건설되는 등 영등포지구는 일반 공업시설 외에 군수시설 등이 속속 들어서면서 노동자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당시 도시 주택공급은 한인과 일본인 집장사들이 맡아했으나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는 물자부족으로 주택가격이 통제됐다. 조선총독부는 심각한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1941년 조선주택영단을 설립해 공공주택을 대량으로 공급하게 된다.     


영단주택은 1941년 10월 말에 주택건설을 위한 지진제를 열고 이듬해 9월 준공했다. 지진제는 공사 도중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땅의 신을 진정시키는 일종의 고사다. 총 200동 659세대가 지어졌으며 갑, 을, 병, 정, 무로 크기를 달리 한 표준규격 주택이 들어섰다.     


영단주택에는 일본인들뿐 아니라 공단에 취업한 한국인 노동자들도 함께 살았다. 갑(20평)· 을(15평)은 주로 일본인 관리나 직원에게 분양됐고 병(10평), 정(8평), 무(6평)는 한국인 노동자나 서민용으로 임대됐다. 대지는 건평의 3배 이상, 하루 4시간 이상 채광 가능, 외관은 일식이지만 방 한 개는 반드시 온돌이라는 조건으로 지어졌다.     


도시의 역사에 대해 이런저런 정보를 끌어 모아 사전 지식을 갖고 거리나 골목을 누비면 아는 만큼 보인다. 그 옛날 영등포 공업단지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의 안식처였던 영단주택. 그들의 귀가길을 좇아 골목을 접어드니 멀리서 병아리 같은 노란등이 반짝인다. 가까이 가서 보니 ‘라-멘’(ラ-メン)이란 일본어가 쓰여 있는 주막등이다. 골목 어귀에서 점포 출입구가 보이지 않다 보니 손님들이 찾기 쉽게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필자도 주막등을 보고 찾아갔으니 성공적인 옥외광고물인 셈이다.     


영단주택가 초입 돈코츠라멘 성지 ‘로라멘’


매운 돈코츠라멘에 챠슈를 추가했다. 돼지뼈, 닭뼈 등을 우려낸 육수는 농후하고 짭짤했다.


출입구에는 노렌(暖簾, 상점 입구 처마 끝이나 점두에 치는 상호가 든 막)이 걸려 있어 일본 음식점이란 것을 나타냈다. 문 왼쪽으로 주막등이 또 하나 걸려있고 위쪽과 노렌에는 영어로 로라멘(RORAMEN)이란 상호와 소금 로(鹵)자를 디자인한 상표가 있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창이 있어서 손님이 얼마나 찼는지를 알 수 있다.     


실내는 전형적인 일본식당 모양으로 주방을 둘러싼 다찌와 열 개 남짓한 의자가 전부다. 키오스크를 통해 주문을 하고 자리가 없으면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 부부인 듯한 젊은 남녀가 주방을 꽉 채우고 분주하게 라면을 만들어 내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마스크를 쓰고 있는 바람에 그들의 인상을 절반밖에 보지 못했다. 손님과 식당 주인과의 접점은 재방문 의사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그것을 판단할 수 없어서 아쉬웠다.

     

매운 돈코츠라멘에 챠슈(돼지고기)를 추가했다. 이 집의 주력 메뉴는 돈코츠라멘과 마제소바다. 라멘은 대표적인 일본 대중음식이다. 중국 납면(拉麵, 라몐)이 어원이다. 그래서 일본 상륙 초기에는 ‘지나소바(支那そば)’, ‘주카(中華)소바’, ‘난징(南京)소바’라고 불렸다. 1958년 사업가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가 개발한 인스턴트 라멘 ‘닛신(日淸)치킨라멘’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라멘’이란 이름이 정착됐다고 한다.     


일본 된장으로 맛을 낸 ‘미소 라멘’, 간장으로 맛을 낸 ‘쇼유 라멘’, 소금으로 맛을 낸 ‘시오 라멘’ 등이 있고 돈코츠(豚骨)라멘은 돼지 뼈를 우린 육수로 맛을 내는 것이다. 토핑으로는 돼지고기(챠슈), 파, 삶은 달걀(맛계란), 목이버섯 등을 얹는데, 지역이나 점포에 따라 다르다. 일본 라멘도 우리 평양냉면처럼 ‘계열’이 있다. 이 집은 교카이 계열 라멘집이다. 돼지사골, 닭뼈, 어패류로 육수를 낸다. 차슈와 맛계란은 간장에 살짝 조려서 나온다. 특히 챠슈는 나오기 직전에 토치로 겉을 살짝 태운다. 토치에 그을린 챠슈는 비주얼을 더하긴 하지만 맛을 크게 끌어 올리진 못했다.  


마제소바는 나고야 식으로 민찌(돼지고기 고명)와 각종 채소, 계란, 어분 등 30여 가지 재료가 들어간다고 한다. 소바와 섞다, 비비다라는 의미의 마제루(まぜる)를 결합시킨 이름이다. 계란 노른자를 터트려 반쯤 비벼 먹다가 나머지는 다시마식초를 풀어 먹으면 다양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마치 평양냉면을 먹는 다양한 방법이 떠올라 재미를 더한 메뉴다.     


“아스팔트가 일어날 때까지 마시는 ‘아스팔트’?”


필자가 한라토닉을 개발한 2차로 가기 좋은 요리주점 ‘아스팔트’.


인근 대로변에는 ‘아스팔트’라는 2차로 들리기 좋은 주점이 있다. 여사장 혼자서 예닐곱 개 되는 테이블을 쳐낸다. 대부분 안주가 즉석에서 조리를 해야 하는 것이라서 손님이 몰릴 때는 사장의 동선이 분주하다. 게다가 복층 구조로 돼 있어서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저절로 ‘셀프 서빙’을 하게 된다.     


이 주점에서는 필자가 개발한 ‘한라토닉’을 주로 마신다. 제주산 소주 한라산과 진로 토닉워터를 섞어 칵테일처럼 마시는 데 달근한 게 목 넘김이 좋다. 이 점포는 토마토 소스를 곁들인 가지튀김이 가장 잘 나가는 메뉴고 골뱅이무침, 치즈계란말이, 오징어버터구이, 번데기탕 등이 주력이다. 여사장의 요리솜씨에 반한 여성 손님들이 많은 게 특징이다.     


아스팔트란 상호는 흔히 말하는 취해서 넘어졌을 때 ‘아스팔트가 일어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무시무시한 상호가 아닐까 싶다. 반대로 아스팔트 일어설 때까지 마시지 말라는 경계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문래 창작촌은 속도는 느리지만 분명히 변하고 있다. 골목에는 새로운 간판이 많이 늘었고 이들을 찾는 젊은 고객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돼지꼬리구이  전문점 ‘돈꼬불’, 주점 강자 ‘채윤희’ 등 개성 있는 다양한 점포들이 이 지역의 다양한 시층만큼 점점 늘어나고 있다. 종로 익선동처럼 마을의 정체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변화가 아닌 스틸타운으로 불리는 산업화 시기와 일제 강점의 역사를 품으면서 발전하는 동네가 되길 소망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파트박물관’ 충정로 일대를 걷다 만나는 맛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